고집스럽게 대한민국 여권을 지니고 산다. 미국 생활, 올해로 30년이 넘었지만 말이다. 두 아이들이나 심지어 아내까지도 이렇게 살고있는 나의 모습을 답답해한다. 특히 9.11테러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제한조치, 시민권자가 아니기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이런저런 불이익을 일깨우며 ‘독수리 여권’을 권한다. 그러나 그저 말로 끝날 뿐 내 손에는 아직도 “대한민국 여권”이 들려있다.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병역의무도 충실히 이행했다. 또 대학졸업 후 이곳으로 올 때까지 각종 세금도 또박또박 냈다. 말하기 좋게 6, 70년대를 짊어졌던 대한의 일꾼이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놓고 ‘입씨름’하던 기억이 새롭다. 내 차례가 되어 두서없는 ‘행복설’을 뿜어낸다. 사람으로 그것도 남자로 태어난 것. 농사짓는 농촌 가정. 내 아버지, 어머니의 맏아들로 태어난 것. 누님과 남녀 동생이 있는 것. 삼천리 금수강산.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난 것. 여기까지 말하자 선생님께서 “그만해 둬 이놈아, 것 멋만 들어가지고….” 어찌보면 내력있는 “내 것 사랑”이고 “내 나라 사랑”이 아닐까 뇌어 본다. 맺힌 것이 많은 5, 6월을 보내면서 더욱 그렇다.
6월 28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재외국민 참정권 제한 (현행 공직선거법 16조, 37조, 38조 1항 등)에 대해 “헌법불일치”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주민등록이 된 주민”이니 “관할지역에 주민등록이 돼 있는 자”, ”부재자 신고대상을 국내거주자로 한정” 등으로 제한하던 선거권을 모두에게 풀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한국) 국적을 갖고 해외에 살거나 체류중인 사람들에게 완전한 선거권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2008년 12월까지 관련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 285만여 재외국민 또한 한국의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국민투표 등에 ‘재외국민’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 일정기간 국내에 거주해야 하는 요건이 있어 현실적으로 어렵기는 해도 재외국민의 피선거권까지도 달라질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낳아 준 나라를 “조국(祖國)”이라 부르지 못하고 “모국(母國)”이라 불러야 하는 처지기에 참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얼마쯤 눈치보이는 노릇이지만, 이를 크게 반긴다.
먼저 모국의 큰 힘을 읽을 수 있기에 반갑다. “새로운 한반도”를 꾸려 지구촌의 중심축이 되겠다면 개혁과 개방은 그 첫 관문이다. 한미 FTA 협정 서명과 발 맞춰 미주 140만여명을 비롯한 285만여 재외국민의 역량을 추스리고 엮어 쓰겠다는 실천적 결단을 본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부재자 선거로 비용이 늘겠지만 우리나라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고, 비용 부담 때문에 민주국가의 근본인 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당당한 모습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1999년 같은 헌법소원에서 “선거권 제한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구촌 시대의 격변하는 변화를 담겠다는 대한민국의 당찬 기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뒤이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재외국민”이라는 실체가 법으로 확인되었음이 더없이 반갑다. 30여년 동안, 대한민국 여권 들고 “해외동포”, ”미주동포”, ”교포”, ”교민” 등으로 불리며 이런저런 눈치보던 시절을 끝낼 수 있어 그렇게 좋다. 놀랍게 변한 서울의 민원창구에서 겪었던 살가운 서비스를 재외국민으로서 이곳 미국에서도 누릴 수 있어 그 또한 기분 상쾌, 더 없이 좋다.
이번 12.19 대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느냐? 마냐? 하는 것은 그리 급히 서두를 것이 아니다. 소중한 285만여 재외국민의 참정권 부여 정책이 사활(死活)을 걸고 다투는 정치집단의 이해와 책략에 휘둘리고 놀아나 그 참뜻을 잃어서는 안된다. 더더욱 정부가 이제까지 강조해오던 재외국민의 안정적 현지정착과 주류사회 진출 의욕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새로운 재외국민 지원대책을 다시 세워야 한다. 재외국민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삶의 터전을 다질 수 있는 실속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쑥 내미는 투표권 하나가 몰고 올 정치바람의 피해는 너무나 클 것이다. 이곳 미국에만 140만 8천여명의 재외국민이 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 108만여명이다. 한반도의 앞날을 위한다면 미, 중, 일본의 심기도 살피면서 각 지역의 재외국민을 하나로 묶는 지혜를 쏟아야 할 것이다. 어느 한가지도 서둘러 될 일이 아니다.
“재외국민” 원년을 여는 기쁜 마음으로 “대한민국 여권”을 가슴에 품어본다. 그 맛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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