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면 우리도 한국대선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재미한인사회가 들떠있었던 지난 주말, 미국의 언론들은 두 가지 이슈를 머릿기사로 올렸다. 연방대법원의 인종통합교육 제한 판결과 상원 이민개혁안의 죽음.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안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결과 안쪽에서 하나의 같은 맥락이 짚여진다. 오른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지고 있는 미 사회의 정서다.
불법체류자 사면 절대반대를 외치며 차지한 강경보수의 ‘정치적 승리’보다 더 착잡하게 와 닿는 것은 대법원의 우회전이다. 앞으로 30년 이상 계속될 ‘우향우’ 행진의 출발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6월말로 석달간 긴 휴정에 들어간 연방대법원의 2006~2007 회기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겐 제2기였지만 부시대통령이 새로 지명한 로버츠와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이 시작부터 함께한 첫 회기이기도 했다. 두명의 보수 판사가 입성한 연방대법원의 변신은 사실 예상되어온, 그러니까, 당연한 결과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부시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룬 ‘대법원의 보수화’는 부시 시대의 유산으로 오래도록 우리생활 곳곳에 영향을 끼치며 남아있을 것이다.
금년회기 대법원의 성적표는 채점자에 따라 하늘과 땅이다. 레이건 때부터 꿈꿔온 ‘이상적 대법원’의 실현에 감격한 보수진영에서는 찬사를 보내며 표정관리에 애쓰는 모습이고, 지난 반세기 넘게 약자를 위한 사회변혁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진보적 대법원’의 쇠퇴를 목격한 리버럴 진영에선 분노와 우려가 뒤섞인 침울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대법원장으로 취임하며 로버츠가 가장 강조한 목표는 만장일치의 판결과 선례에 대한 존중이었다. 대법원내의 이념전쟁 종식을 다짐했고 사회정의 실현에 기여해온 선례를 정당한 이유없이 뒤집는 것은 지양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은 경기규칙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규칙을 적용하는 야구심판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비유까지 덧붙였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신념은 별로 반영되지 못했다.
지난 10월부터 대법원이 내린 68건의 판결 중 5대4로 양분된 케이스가 24건이었고 그중 진보와 보수가 이념대결로 맞선 끝에 내려진 판결이 19건이나 되었다.
9명 대법관 중 로버츠와 앨리토에 더해 앤토닌 스칼리아와 클레어런스 토머스가 보수그룹을 이루고 최고령인 존 폴 스티븐스와 루스 긴즈버그, 스티븐 브레어와 데이빗 수터가 진보그룹으로 뭉쳐 팽팽히 맞섰던 이 19건의 5대4 판결 모두에서 스윙보트를 행사한 것이 앤서니 케네디였다. 그리고, 케네디는 오코너가 아니었다. 실용적 중도파로 대법원 이념대결의 균형을 잡다가 은퇴한 샌드라 오코너 대법관 보다 훨씬 오른 쪽으로 기울어진 케네디의 스윙보트로 보수진영은 13개 판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지난 9개월간 로버츠의 대법원은 낙태에서 인종통합, 선거자금법과 표현의 자유, 근로자와 소비자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 진보이슈에 가차없이 메스를 가했다. 4월엔 낙태제한법을 합헌으로 인정했고 6월말엔 역차별 소송을 제기한 백인부모에게 승소를 안겨주며 인종통합을 위한 교육구 정책을 위헌으로 판시했다. 몇년전 같은 성격의 케이스에서 오코너의 스윙보트로 결정되었던 선례들과는 정반대 방향의 판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로버츠와 앨리토가 아직은 조심스럽게 삼가는 신중한 보수라는 사실이다. 낙태합법화를 명시한 1969년의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이나, 인종분리 교육을 중단시킨 1954년의 브라운 판결 자체를 번복시켜야 한다는 강경보수 스칼리아나 토머스의 주장엔 동조하지 않고있다. 그들처럼 노골적 액티비스트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칼리아에게 ‘중도인척 하지말라’고 핀잔을 들을 정도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이 소극적 보수로 남아있을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이민개혁안은 2008년 대선 캠페인의 뜨거운 이슈로 되살아날 것이다. 대법원의 보수화도 중요한 대선 이슈로 부각되기를 기대한다. 부시는 2004년 캠페인에서 공약했던대로 보수파 대법관을 지명했다. 우리도 다음 대선주자들의 대법관 인선 기준을 듣고 싶다. 그것은 세금이나 헬스케어 못지않게 이 사회 소수민들에겐 중요한 이슈다.
86세의 스티븐스나 75세의 긴스버그는 십중팔구 다음 대통령 임기중 은퇴할 확률이 높다. 진보적인 이들 두 대법관이 물러난 자리에 만약 또 두명의 우파 대법관이 지명된다면…7대2로 잔뜩 기울어진 보수 대법원?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진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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