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어린이법회 고문)
1996년 6월7일 김포공황에서 싱가포르 비행기로 15박16일간의 여정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룩하면서 날씨가 쾌청하여 고도5000피트 이상에서도 지상의 움직임이 환하게 내려다 보였고 창 밖으로 펼쳐 보이는 구름 기둥이나 높은 산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서 머나먼 하늘아래, 아련히 내려다보이는 땅과 함께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사에 사뭇 감회에 젖는다
어느덧 비행기는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 얼마간을 기다리다 싱가폴에서 스리랑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싱가폴 창이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 간 비행기는 싱가폴의 화려한 야경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 선회하면서 밤하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스리랑카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3 시간여의 비행 끝에 비행기는 이번 여행의 모티브가 되어 주었던 스리랑카 땅으로 우리들을 내려 놓아 주었다. 오랜 비행에 심신이 피로해 일행 모두들 무표정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내전(內戰). 탓으로 공황 분위기는 적막하게 느껴졌지만, 우리들을 맞이한 스님들의 밝은 모습은 우리를
안도케 하였다. 인도 남동쪽에 자리잡은 섬나라,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로 길거리 어디서든지 부처님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꽃과 보석의 나라라고 알려질 만큼 꽃을 이용한 장식을 여러 곳에 하고 있었다. 귀빈이 오면 꽃 묶음을 걸어주는 것이 불교식 인사라고 한다.
순박한 자연과 때묻지 않은 사람들의 미소는 친근해 보였고, 사회주의계열국가이면서도 외자유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볼 때 경제개발에 깊은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스리랑카 섬 북부를 장악한 타밀반군은 인종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로 여전히 교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콜롬보의 경우 곳곳에 무장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어 아직은 정국이 불안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준비된 차량으로 우리는 콜럼보의 보현정사에서 여장을 풀었다. 콜럼보는 스리랑카의 수도 이며, 식민지 시대에 외국인이 건설했기 때문에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도시이면서도 가장 스 리랑카답지 않는 도시라고 일컬어진다.
현음 스님께서는 송광사 보조종재일에 구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받으시고 대학교를 졸업 하시고 스리랑카로 유학하여 팔리어를 배우고,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법을 습득하셨다. 스리랑카로 유학을 가시어 그곳의 수행법에 자리를 잡고 계실 때 여러 국가의 스님들의 연 약한 환경을 보시고, 한국에 계시는 현문스님, 법정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스님들과 재가 불
자들로 구성된 장학회(후원)를 만드셨다.
6월8일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은 스리랑카, 버마, 캄보디아. 네팔, 인도, 베트남 방글라데시 이등 여러 국가의 60여명의 장학회 스님들께 공양을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근교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설이 깃든 성지 라자 마하비하라 사원, 스리랑 카 성지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하면서도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는 케라니아 사원으로 향하였
다. 여러 가지 부처님 모습과 부처님께서 겪은 여러 가지의 벽화 앞에서 기도 하시는 사람 들을 볼 수 있었다. 사원을 방문 할 때에는 신발을 벗고, 부처님께 올릴 향과 봉우리 상태 인 꽃을 한장 한장 조심스럽게 꽃 잎을 펼쳐 바치며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스리 랑카 사람들의 종교적 신심을 숨김 없이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내 어둠이 찾아와 사원의
주변에는 코코넛 기름을 사용한 램프기 하나, 하나씩 불이 밝혀졌고, 그야 말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 하였다.
6월 10일 아침 햇살을 가로지르며 비디아라카랑 사원과 현음 스님께서 공부하시던 마하라 가라 사원 등에서 대중 공양을 올렸다.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또 한 저녁에는 콜롬보 시장님의 댁으로 우리 일행을 초대하셔 전통적인 스리랑카 음식의 맛을 음미 할 수 있었다. 과거 우리나라가 오롯한 농경 국가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스리랑카에서는 지금도 쌀이 가장 중요한 먹거리며, 꼭 상에 오르는 음식이 쌀과 카레로 만든 람프라, 부리야니, 카하 바투, 쌀가루로 만든 과자로는 커드,
와타랍판, 열대과일로는 망고, 파파야, 람브부탄, 코코넛, 잭 프루츠등 스리랑카산 실론 티는 홍차 중에서도 최상등급”이라며 “스 리랑카 사람들은 지금도 영국 지배 영향으로 하루 두 세잔씩 홍차를 마신다”
6월11일, 장 시간 끝에 2,500년 전의 최대의 도시인 아누라다푸라에 도착 하였다. BC236 년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하여서 스리랑카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고 하는 바, 그로 인하여 건설된 도시라 한다. 불교유적지의 핵심인 이 도시는 기원전 5 세기부터 약 1,500 년간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고대도시로서, 2000 년 이상 된 불교 유적이 무수히 많았다.
BC380년에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1017년까지 1,500여 년간 수도로서 화려한 문명을 피었다. 웨와스(Wewas)로 알려진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시설을 확충함으로 써, 농업은 번창하였고, 그때 만들어진 저수지는 지금도 사용할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 다. BC3세기경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아누라다푸라의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수많은 사원, 거대한 탑과 조각 상들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아누라다푸라의 문 화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한다.
6월 12일, 새벽 상큼한 공기를 헤치며 스리랑카 스님들의 도움 속에 부처님께 바칠 공양물 을 준비해 올렸던 보리수 나무 밑에서의 기도는 불심을
뜨겁게 하였다. 기원 전 3세기에 아 쇼카왕의 딸 싱카미타가 인도 붓다 가야의 보리수를 가져와 데바남피야팃사완이 심은 것이 라 한다. 보리수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수령이 2500년이라고는 생각 될 수가 없을 만큼 생
생하였다.
사원을 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도투게무누왕 시대에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왕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대나무 천
등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완성된 탑 모습을 보여 드렸다는 높이가 50m, 338 개의 코끼리 조각품으로 둘러 쌓인 완웰리세야 대 탑과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성지 미힌탈레를 참배 하였다. 아누라다푸라의 왕 데바남
피야팃사기 이곳으로 사슴 사냥을 나왔을 때 이 산의 신데바는 왕께 불교를 퍼드리기 위해 찾아온 인도 아쇼카의 아들 마힌다를 만나게 해주기
위하여 사슴으로 변신 하였다. 왕은 데바신이 변신한 사슴을 쫓아가다가 마힌다를 만나 대화 끝에 불교에 귀의 하였으며, 왕과 신하와 백성들 모두기 불교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모든 불교 유적들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아주 소중한 성지라 느껴진다. 특히 마하 세라 대 탑으로 난 계단을 오를 때는 플루메니아의 달콤한 향이 성지를 향하는 수 많은 계 단을 오를 때는 플루메니아의 달콤한 향이 성지를 향하는 수 많은 계단을 오르는 가운데 생 겨난 피로를 깨끗이 씻어 주는 듯 하였다 6월13일 정글 속에 푸른 하늘을 향해 솟은 1600년 이상의 비바람을 견뎌내고도 또렷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간직한 15m의 화강암으로 된 아우카나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의 평온과 후세의 행복을 기원하며 왕들은 거대한 사원과 아름다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뜨거운 열대의 태양 아래 지금은 유적이 된 사원과 불상 앞에 서면 간절한 기도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6 월 14 일 우리 일행은 과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파라쿠라마 1 세 때에 건축 된 폴론나루와 7 층 궁전, 투파라마사원 안에 있는 불상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얼굴이나 손 발이 겨우 윤곽만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아픔을 뒤로 하고 우리는 깊은 정글 속에서 잠자고 있는 메디리기리아 유적을 보려 갔다. 1500 년 전의 주춧돌을 보아 그 당시 불교의 규모를 알 수 있었고, 불상의 복장과 눈의 보석을 빼느라 파손되었다는 부처님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무더운 열기 속에서 풀론나무와 유적들을
참배 하였다. 특히 파라크라마 바후 1 세 때 세워진 칼 비하라 불교 사원에서 본 길이가 14m 나 되는 열반상은 오른팔로 머리를 괴고 왼팔은 몸을 따라 쭉 뻗었으며 좌우 크기가 다른 발 모습과 .발 밑에 자잘하게
뻗친 연꽃의 뿌리는 땅을, 꽃은 하늘을 향하였고 입상은 높이는 7m, 좌불상은 5m 에 달했다. 열반상, 입상, 좌상 앞에 서면 석상이 주는 위압감보다 원만한 선의 자태나 부드러운 표정에서 고요함과 편한 함을 느낄 수 있었다.
6월15일 시기리야 사자 산으로 향하였다. 경사가 급하여 적갈색의 바위를 기다시피 하여야 만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요새. 시기리야 록은
예술가이며,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샤파 왕이 부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뒤 후환이 두려워 바위 꼭대기에 세웠다는 궁전 터다. 암벽의 높이는 200m는 되었으며. 그 산꼭대기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11년이나 살았다는 왕의 권력. 그러나 장구한 시간 속에 시간은 남고 인간사는 마치 스치는 바람인 양 허물어 갔음에 인간으로써 쓸쓸함과 고독 함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 카사파는 동생 목갈라나의 복수가 두려워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11년 후 인도로 간 동생이 군대를 이끌고
왔을 때 싸움 중에 카사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가 수렁에 빠져 통제력을 잃은 바 혼자 남은 카사파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야망과 슬픔이 가득한 시기리야, 그리고 “시기리야 레이디” 벽화. 1,400년이란 세월의 잠에서 깨어난 18명의 미녀들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작품이라 하였다. 오후에 2,200년 전 조성된 최대 석굴 사원 담불라에 갔다.
150명의 부처님과, 석가의 생애, 그 나라의 역사 그림들이 얼룩에 젖어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 나라 자체에서는 보수가 힘들어 유 네스코의 도움으로 동굴 보수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불교의 귀중한 유산이 잘 보존되었으면……
6월16일 전통 예술의 수도 캔디에 도착 하였다. 이곳에있는 불치사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4세기에 자이나교 의 세력에
쫓긴 남인도의 한 왕녀가 부처의 치아를 머리카락 속에 숨겨 스리랑카로 가지고 왔다는전설이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매년 7∼8월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코끼리 등에 부처의 치아를 싣고 시내에서 불치 축제가 열린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불치를 매우 소중이 여기며, 또한 그것은 왕권의 상징으로 여겼다.
예전 포르투갈인이 스리랑카 수도를 점령 했을 때, 불교도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불치를 빼앗아 없애버리려 하였을 때 가짜 사리로 그들을 속여
진짜 부처님 사리는 캔디에 안전하게 보존했다고 한다.
6월17일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스리랑카 달마로카스님의 도움으로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 을 준비하여 불치사 예불에 동참 할 수 있었다.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는 감실(일곱 겹의 황금 상자 속에 보관)은 하루에 3번 열리며, 푸자(사시공양)때는 악기 소리와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고, 향 냄새로 가득한 경내에는 아침 일찍 많은 참배객들이 진지하게 기도 드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한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퀀즈호텔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식민지 호텔로서, 내부 장식이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캔디 시내에는 식민지 시대 풍의 건물들이 보였으며, 저녁 공양 후에는 The Kandy LakeClub로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화려한왕조의 춤인 캔디 안 댄스, 부처님께 푸자 시 올리는 푸자나투마(춤), 가면을 쓰고 악마를
쫓는 라크샤 나투마등 춤은 인상적이 였다. 이 모습을보면서 스리랑카 인들의 전통예술을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6월18일 우리들은 다음코스인 향하여 발길을 재촉하였다.스리랑카 중부에는 1,000m가 넘는 많은 산들이 있다. 이지역은 열대지방이라고 할 수 없
을 정도로 서늘한 기온이 느껴진다. 푸른 산들이 이어져눈 높이에서 구름이 흘려가듯, 카펫트를 깔아 놓은 듯한 홍차 밭 사이 사이에는 계곡이
흐르고, 군데군데 폭포를 이루며 차장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고원지대의 신성함과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와라엘리아에 도착했다.
누와라 엘리아는 영국 식민지 시대에 피서지로 이름을날렸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원의 골프장, 우리 일행들이 머물던 그랜드 호텔은 건축
양식, 서비스가 스리랑카답지 않는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혼 부부들이 최고로선호하는 곳으로 지금도 그때의 흔적을가지고 있는 영국식 건물이었다.
6월19 이후, 우리 일행은 학 갈라 식물원을 거쳐카타라가마로 유적지를 참배하고, 알라 국립공원의 길을 따라 가까이서 사파리를 구경하고, 다시
콜롬보에 도착하여 300년 전 부처 님 눈이 사파이어로 장식 된 수보리 라바 사원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에서 복장 속에 경전,보석등을 넣어두는 것과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눈을보석으로 장식한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유적을 돌며, 작은 섬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천혜의 자연경관 속에서 우리는고대로부터 불교왕국으로서의 번영을 누렸던 흔적들을
가는 곳 마다 볼 수 있었다. 한편 이섬에는 드라이 존이라 불리는 역대 왕들이 건립한 거대한저수지가 있어 이러한 유산들이야말로 농업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능가하고 남는것이었다.
내가 본 스리랑카는 맑은 숲,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웅장한 인도양의 모습은 좀처럼 잊기어려울 것 같다.스리랑카인 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맑은 빛의눈동자는 그들 마음 속에 깃든 소박함과넉넉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한편 스리랑카성지순례는 항상 바쁘게 살아가는우리에게 잃어버린 마음의 공간을 회복 시켜 주었고, 내자신의 삶에 있어 그 삶의 의미성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 불자들과 함께 여행의 동반자가 되었던 현문주지스님과 일중스님, 바쁘신 일정을 취소하시고 동행해 주신 스리랑카의 달마로카 함두루
스님과, 콜롬보 시장님 내외분과아드님 하시트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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