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효 LA 총영사
주류사회에 적극 기여로 한인위상 올려야
한인 미주이민 100년
타민족 비해선 짧아
한류현상도 아직은
동아시아계에 국한
-옥스포드 에쉬몰리안(Ashmolean) 박물관과 한국 문화재
영국 최초의 박물관은 1683년 옥스포드 시에 설립된 에쉬몰리안 박물관이다. 중국 및 일본 도자기와 그리스 등 중동 도자기가 다수 소장돼 있다. 필자는 1970년대에 그 박물관 근처에 살았다. 에쉬몰이 도자기 수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정작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접하면서였다고 들었다. 당시 그 박물관에 들어서면 전주(옷)장을 최초로 만나게 되어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1980년대에 런던에 살면서 영국의 고가구점들이 동양가구 가운데 한국 가구를 최고로 여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고가구나 도자기는 단순·소박한 미적 감각을 수준 높게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서양에서는 이런 미적 개념이 20세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각광받았다. 시대를 앞서 간 백남준의 예술세계도 이런 한국의 예술 문화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뉴질랜드 국립박물관의 Rule 컬렉션
1990년대 초 뉴질랜드에 근무하는 동안 최대 도시 오클랜드의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는데 입구의 가장 중요한 전시실에 한국의 신라 토기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150여점의 우리 문화재가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한편 놀랍고 한편 의아하였다. 박물관 측은 “이 한국 유물들은 남반구 최대의 한국유물 컬렉션”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2년 후 귀국 무렵 그 박물관장이 우리 대사관이 있는 웰링톤에 오는 길에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박물관장은 그 한국 유물은 박물관 것이 아니고 1960년대에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Peter Rule의 소유로 지금까지 박물관에 장기대여 전시를 해왔으나 최근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문제는 그 유족들이 유산을 배분하려고 전시물을 모두 처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박물관 측이 구매한다면 유족들은 약 25만달러의 저렴한 가격에 일괄 매각하고, 아니면 국제 경매에 내놓겠다는 것으로 전시물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질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를 사들여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개인 소유로 하되 박물관에 장기 임대해 줄 한국인 독지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뉴질랜드에는 한인 이민자 중 녹용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분들이 있어 의사를 타진했으나 관심 있는 분이 나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한국 정부에서 사들여 박물관에 장기 임대해 줄 것을 적극 건의하였다. 몇 달 걸리기는 했으나 드디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일괄 구입해 오클랜드 박물관에 장기 임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 미술관과 이병창
필자는 2000년 가을 세계무역센터 회의 참석차 오사카에 간 길에 몇 개의 박물관, 미술관을 찾아보았다. 호텔에서 안내서를 보니 오사카 시청 뒤편에 99년 3월 신관을 새로 연 동양도자미술관(Osaka Museum of Oriental Ceramics)의 소장품이 아주 좋다는 평이었다. 찾아갔더니 스미토모 그룹의 21개사가 공동 기증한 965점의 동양도자기(아타카 컬렉션)와 재일동포 이병창 컬렉션을 중심으로 하는 수준 높은 한국 도자기가 전시품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 매우 놀랍고 반가웠다.
자연 채광으로 도자기의 원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은 현대식 건물로서 시 청사 바로 뒤편 강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의 입지를 통해 문화재 특히 한국 도자기 소장품을 아끼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튿날 오사카 주재 우리 총영사를 만나 그 소감을 얘기하고 어떤 연유로 이병창씨가 수백억원의 가치가 넘는 그 많은 한국 최고 도자기들을 오사카시에 기증했는지 물었다. 사연인즉, 이병창씨가 연로해 소장 유물을 기증할 곳을 찾는다는 얘기가 있어 그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총영사는 한국도 이제 열망하시던 바대로 민주화도 이룩하였으니 소장 문화재를 조국에 기증할 것을 권유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총영사 자신의 처지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라고까지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병창씨는 결국 오사카시에 기증하였고 오사카시는 그의 소장품을 소장 전시할 동양도자미술관 신관을 최고의 위치에 최첨단으로 짓게 됐다는 것이다.
이병창씨가 총영사더러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해 달라고 했다는 소장품 일본 기증 이유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첫째, 자신은 해방 후 주 오사카 영사 사무소에 근무하다 그만두고 일본에서 사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 둘째, 그렇게 번 돈으로 일본 내에 있는 한국 도자기를 사 모았다. 셋째, 재일 한인들이 일본에서 아직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데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하나라도 많은 일본인이 보아야 한인들이 존중 받을 수 있다. 넷째,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기증해도 아직 한국은 유물에 합당한 좋은 전시장을 마련할 여건이 못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총영사는 이를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하고 문책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기타 박물관들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의 피츠 윌리암스 박물관(Pitts Williams Museum)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 런던의 영국박물관, 빅토리아와 알버츠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파리의 동양미술박물관(고려불화 등),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예술박물관 등이 필자가 가본 곳 중에서는 도자기를 중심으로 한 한국 우수 문화재를 비교적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올 5월에는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도 한국실이 개장한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에도 한국 문화재 소장품이 상당하다고 하는데 박물관 공사관계로 지난해부터 닫혀 있어 화첩으로만 접하고 있다.
기타 유럽이나 미국 각지의 유명 박물관은 대개 한국 도자기 몇 점씩은 소장하고 있으나 빈약한 편으로 알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그 심장부에 사는 한인
누린 것만큼 역할 할때
한인들 힘도 쑥쑥 성장
5. 미주한인들의 역할은
우리 모두 한국 문화의 힘이 무엇인지, 또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미국사회에 파고들어야 할지에 관해 생각해 볼 때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국에서만 산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여행을 가면 집 생각이 더 나고, 해외에 가면 조국을 더 생각하고, 이민 와서 다른 문화권에 살면 자신의 뿌리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한국 역사는 5,000여년 전 고조선부터 비롯된다고 하나 아직 고대사 연구는 일천하고 매우 부족한 현실이다. 조선시대 500여년 동안 중국 중심의 사대사상에 젖어 우리 고대사를 등한시했고 일제통치를 거치며 식민사관에 물들어 일본 학자들의 연구만 떠받든 결과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높이는 노력이 힘을 얻고 있어 다행스럽게 여긴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에 바로 그 중심부에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은 조상들의 예술 문화정신을 주류사회에 전파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세계문명에 기여하고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 될 것이다.
미주 한인이민 역사가 100여년이 된다고 하지만 타민족 이민사에 비해서는 짧기 때문에 미국 정치사회에 대한 한인들의 기여는 이제 막 개화 단계에 있다. 경제적으로는 이민 1세대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단기간에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민족·다문화의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가치들에 대한 한인들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 아닌가. 문화면에서는 최근 미국 내에서 한국음식이 주류사회에서 일부 인정을 받고 있으나 중국, 일본, 태국 음식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한류현상도 아직 주류사회보다는 미국 내 동아시아계 커뮤니티에서 주로 평가받는 등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한인의 기여는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타민족들이 수백년 고생 끝에 세계의 중심 국가로 건설한 미국에 뒤늦게 온 한인들은 사실상 무임승차해 사회·제적 지위를 수월하게 확보했다는 불만이 아직도 어렵게 사는 일부 타민족들에게 잠재해 있을 수 있다. 1992년의 LA 4.29 폭동 때 한인들이 애꿎게 당한 피해도 옳든 그르든 이러한 인식에 뿌리가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 한인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한 결실이기도 하지만 선진 미국에서 많은 혜택을 누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팍스 아메리카나의 핵심부인 미국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독자들의 진지한 토론과 의견 제시가 있기를 고대한다.
청자퇴화 연화문 주자
고려시대, 높이 15.4cm 지름 22.4cm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이병창 기증
둥근 몸체 양면에 커다란 원문을 두고 그 속에 연화꽃을 표현하였는데, 언뜻 보아서는 문양의 배경을 백토로 역상감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상감기법이 아니라 백토를 바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경우는 표면에 연화모양으로 오린 종이를 붙인 뒤 그 위에 백토를 바른 퇴화(堆花)기법으로 추정된다. 퇴화기법은 11세기에도 사용되었으나 전해지는 유물이 극히 드물고, 12∼13세기에 걸쳐 꾸준히 발전되었다.
백자청화 매화문 항아리
조선, 높이 27.2cm 입지름 23.9cm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이병창 기증
구연이 짧게 직립하고 어깨부분이 팽창된 항아리이다. 몸통 상부의 네 곳에는 원권을 두르고 그 속에 매월문(梅月文)을 표현하였으며 원권과 원관 사이에는 칠보문(七寶文)을, 몸체 하부 네곳에는 굽언저리에서 돋아난 초화문을 그려넣었다.
최병효
LA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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