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 이라크전 책임을 묻자는 부시대통령 탄핵안 발의가 제기되었을 때 이런 조크가 나돌았다 : 절대 안된다고 결사반대한다는데 도대체 누굽니까? 민주당 의원들이라는데요. 아니 왜요? 탄핵이후를 생각해 보세요. “오, 노우. 딕 체니 대통령!!!”
상상만으로도 악몽이라는 비아냥이지만 체니도 실제로 대권을 꿈꾼 적이 있었다. 94년이었다. 수백만달러 자금도 모았고 조직도 탄탄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정치가’의 기질이 아닌 체니는 곧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부가들의 비위를 맞추며 어울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캠페인을 접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야망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몇 년 후 조지 부시의 대통령선거 캠페인에 합류한 체니의 책임 중 하나가 러닝메이트 물색이었다. 그는 부시에게 자신이 찾는 이상적 부통령 후보의 자격을 이렇게 나열했다.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백악관과 의회를 잘 알고 선출직 경력에 더해 대규모 연방부서를 관리한 경험이 있으면 좋겠고 워싱턴 정가만이 아니라 실제 세상, 다시말해 대기업 CEO 경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이겠고…’ 6선 연방하원의원과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장관, 포춘500대 기업의 회장등을 역임해온 체니,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의 의중을 읽은 부시는 체니를 러닝메이트로 택했다. 밥 우드워즈가 지난해 출판한 이라크전 비판저서 ‘부인하는 국가’에 소개된 일화다.
부시에게도 나름대로 계산은 있었다. 대권에 뜻이 없는 체니라면 누구보다 충실한 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체니는 충실했다. 너무 충실했다. 여론이나 언론에도 초연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체니의 바로 그 ‘소신 정치’가 지금 부시행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요즘 체니 부통령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사냥 중 친구에게 부상을 입혔던 오발사건 이후 1년여 만이다. 이번주초 백악관 기자실엔 이라크전을 압도할만한 핫토픽이 등장해 기자들을 신나게 했다 : ‘뭐? 부통령이 행정부 소속이 아니라고?’
문제는 지난주말 체니의 부통령실이 그동안 정보안전감시국의 문서 보안점검을 거부해왔고 감시국이 이를 항의하자 아예 감시국 폐지를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감시국의 점검은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한 것인데 체니측이 내세운 거부 이유가 황당했다. “부통령은 연방 상원의장을 겸임하고 있으므로 행정명령에 구속받는 행정부 소속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통령은 입법, 행정, 사법에 더해 제4부쯤 된다는 건가?…평소 자신들이 제4부라고 자부(?)해온 언론들의 집요한 질문에 백악관 대변인들은 진땀을 흘렸고, 상원에선 헌법 작성자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포복절도할 일이라고 어이없어했으며 하원에선 ‘그렇다면 행정부 예산에서 지출되는 부통령실 운영경비를 삭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있다.
평소 극도의 비밀주의를 일관하며 이라크전쟁 등 초법적 정책을 강행하면서도 부시 뒤에 서있었던 체니가 드디어 공격의 확실한 목표로 드러난 것이다.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워싱턴포스트가 이번주부터 체니 영향력의 실체를 파헤치는 특집 시리즈를 시작했다. 수백명의 관계자를 인터뷰하며 1년여 동안 준비해온 탐사기획 보도에 드러난 체니의 파워는 글자그대로 무소불위다.
체니는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다. 처음부터 그가 원했고 부시가 허용한 부통령의 역할은 종래의 실권 없는 한직이 아니었다. 백악관의 모든 회의에 참석하며 국사의 방향을 결정해가는 막강한 자리였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앨런 그린스펀 FRB의장도 체니의 동석없이는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9.11이후 파월 국무와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안보보좌관을 배제한채 테러용의자에 대한 ‘영장없는 도청’이라는 초법적 조치 시행령을 실현시킨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결정권자’는 언제나 부시였다. 그러나 부시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를 제공하는 것은 언제나 체니였다. 콜럼비아 우주선이 폭발했을 때 부시는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만나 슬픔을 달래고 있었고 우주비행의 장래 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린 것은 체니였다.
사면초가에 빠진 이라크전쟁과 가장 의지했던 보좌관 루이스 리비의 퇴출 등으로 ‘체니의 시대는 갔다’는 이야기가 제법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화당 일각에서 이제라도 부통령을 바꾸자는 제안도 나왔다. 체니가 이번 여름 심장박동기 교체수술을 할 때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하자며 후임자까지 공공연히 거론된다.
체니 자신은 늘 그랬듯이 트레이드마크인 옅은 미소를 띄운채 쏟아지는 비난여론에도 개의치 않는 태도다. 소신과 오만의 중간 지점쯤에서 언젠가 자신이 두려운 것은 ‘오직 한가지 역사의 평가’라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최강의 부통령에 더해 ‘최악의 부통령’으로 기록될 것을 우려해야겠지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역사의 평가가 아닌 듯하다. 오늘 연방하원에서 표결에 부쳐질 행정부 지출안에 부통령실 경비삭제 수정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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