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춤추자!”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며 은근히 신경 줄을 자극하던 것이 언니가 던진 한마디로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바로 춤이다.
며칠 전 아침 뉴스를 시청하는데 ‘Dance with Mom’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춤에는 문외한인 4명의 주부들, 젊은 임산부에서 50대 중년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각기 다른 젊은 남자 무용수와 짝을 이루었다. 늘씬한 그들과 비교되며 울퉁불퉁 터질 듯 한 몸매에 화려한 드레스가 어색했다. 차례로 나와서 탱고와 살사 등을 선보이는데 스텝이 꼬이기도 하고 박자를 놓치고,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얼굴표정과 마무리는 프로 못지않게 멋졌고 실수를 해도 서로 격려의 큰 박수로 응원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라 망설이고 걱정을 했는데 춤을 배우는 동안 살아 있다는 존재감과 자신감을 갖게 되고 또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연장자가 인터뷰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와 숨이 차오른 흥분한 목소리가 시들한 내 안의 감성을 자극해 그 이후 문득 문득 떠오르고는 했다. 무엇이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일터로 걸어가다 몇 블럭 아래의 이층 상가에 ‘사교댄스 교습’이라는 간판을 보게 된다. 그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며 몸치에 운동치인 내가 춤을 배울 수 있을까, 비용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저런데 드나들면 혹시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 까,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 곧 시들해지곤 했는데 요즘은 자꾸 눈길이 그곳으로 간다. ‘나도 춤을 배워볼까’ 생각하다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평범한 중년의 남자가 일상생활에 찌들어 답답하게 살다 퇴근길에 우연히 보게 된 댄스 교습소에 등록을 하면서부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영화이다. 일을 하면서도 책상 밑에서는 열심히 스텝을 연습했고,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긴 옷걸이를 들고 춤을 추었다. 그 이후 모든 일에 적극적이 되고 춤이 몸에 익숙해지자 삶의 활력을 찾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짐을 느낀다. 시들하던 직장에서 능동적으로 일했고, 가정적으로도 안정을 찾는다는 줄거리였다. 평소 좋아하던 리처드 기어가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멋진 춤과 음악에 발가락이 꼬물거리며 스텝을 따라했고, 엉덩이가 들썩이며 리듬을 타는 자신을 느꼈다. 내가 여 주인공처럼 춤을 잘 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말 모임에 나가 멋진 스텝을 밟으며 스테이지를 도는 상상에 신데렐라가 된 듯 기분이 좋았던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사교춤’하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다. 한참 중동에 건설 붐이 일 때쯤이었을까, 가정주부들이 시장에 간다고 장바구니 들고 나가 카바레를 출입하면서 ‘춤바람’이 크게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후 가정파탄의 주범이 된 사교춤하면 어두침침한 지하실의 오색조명불빛 아래 왠지 모르게 끈적끈적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연상돼 누군가 사교춤을 잘 추면 ‘혹시’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고는 했다.
춤은 움직임이다. 몸이 움직이게 되면 마음도 그 동작에 따라 리듬을 타게 된다. 우리의 몸 안에는 항상 리듬이 존재하여 심장의 박동, 맥박, 소화시스템에서 걸음걸이, 눈을 깜빡이는 순간적인 것까지 생리적 기능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춤은 일상의 기본이고 인류의 시각부터 함께해 왔다.
원시사회에서는 주술이나 종교적 언어로 표현 될 수 없는 두려움이나 공포, 신에 대한 숭배를 춤을 이용해 종교의식으로 활용했다. 또 억압된 사회 상황 안에서 격렬한 춤사위로 억눌린 감정을 격렬하게 발산시켜 서로 아픔을 치유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정신의 정화작용을 했단다. 요즘은 동작을 관찰해 병을 치료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슬픔이 표현 될 때는 근육이 이완되며 화난 것이 표현될 때에는 근육긴장이 높아지게 되기에 신체적 움직임의 매개변수를 파악해 정신 상태를 조정하고 신경학상의 토대를 재구성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언니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TV를 시청하면서 운동을 한다. 언니의 표현을 빌면 틈새시간을 이용해 돈 안 들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 일석삼조란다. 그렇다고 언니가 춤을 잘 추는 것이 아니다. 전신을 흔드는 막춤에 약간의 요가동작과 신문을 통해 본 운동을 접목한 일명 ‘막요로빅’이다.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해 누구의 눈을 의식하거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의 리듬에 몸을 실어 흥겹게 춤을 추는 언니의 모습 안에 항상 당당하고 젊게 사는 비결이 숨어 있나보다.
나처럼 귀찮니스트들은 자꾸 움츠리고 꾀를 부리기에 온갖 스트레스가 안으로 쌓이고, 세상걱정을 도맡아 한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여야겠다. 생동적인 움직임은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자극제가 된다. 내 몸 자체가 악기이고 리듬이 흐르니 얼마나 쉬운가. 춤을 추며 살자,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자고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언니를 따라서 운동을 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너도 해봐. 얼마나 운동이 잘 되는데. 정식으로 춤을 배워볼까?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춤추자”
언니의 제안에 내 몸 안에 숨죽이고 있던 리듬들이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나라고 나를 부추긴다. 못이기는 척 슬쩍 엉덩이를 들어본다.
<김현숙>
약력: ‘수필문학’ 등단. 재외동포 문학상 콩트 입상.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크리스찬문협 회원. 수필집 ‘사랑으로 채우는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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