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렇게 끝날 일이었는데 그 사람이나 우리나 너무 고생했습니다.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허탈한 마음입니다. 당분간 쉬면서 앞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속칭 ‘세탁소 바지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정진남 씨의 부인 수 정씨가 뱉은 이 말은 이번 사건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세간의 관심은 크게 끌었지만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허점 많은 미국 소송 시스템의 단면만 드러낸 셈이다. 또 세탁업을 비롯한 수많은 스몰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한인들에게 이번 케이스의 결과가 어떻게 나느냐는 초미의 관심사였고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다. 판례를 중시하는 미국 법률 시스템에서 법원이 소비자의 부당한 소송을 무조건 편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세 업주들이 기댈만한 법적 근거가 확보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건이 확대된 경위
법원 판결이 난 후 정씨의 세탁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는 “바지 하나를 분실한 사건이 이렇게 비화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는 상식적으로 분쟁을 조정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사고가 전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에대해 크리스 매닝 변호사는 “판사는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제기된 소송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DC의 경우 한 번 법을 위반하면 1,500달러씩 벌금을 물도록 규정한 소비자 보호법이 악질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남용될 수 있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때 정씨는 피어슨 판사에게 1만2,000달러를 배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그는 오히려 갖은 방법과 규정을 적용해 배상액을 6,700만 달러로 올리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피어슨이 재판에서 “정씨 가게의 ‘만족 보장’ 광고문을 무조건 소비자 편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소비자 보호법이 악용될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쥬디스 바트노프 판사는 ‘상식’을 선택하는 판결을 내려 봇물 소송을 이룰 뻔한 사태를 막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다면 여론의 분위기가 정씨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ATRA(American Tort Reform Association) 등 부당 법률 행위를 막고 시스템을 개혁하자는 법률 단체, 소규모 사업자 단체들의 목소리는 높지만 미국사회가 워낙 개인의 권익을 우선하는 데다 많은 기업들이 엉뚱한 소송에 휘말리기 보다 적당히 보상을 하고 사건을 무마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소송 남용이 근절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윤팔혁 워싱턴한인연합세탁협회 회장은 “이번 사건이 보도된 이후 손님들 중에는 시비꺼리를 찾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면서 “이번 판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세탁소와 음식점 등 소상공업자들에게 파장이 크게 우려됐는데 확실한 판결이 나와 기쁘다”고 말했다.
한인 세탁업계의 대응
이번 사건이 한 업종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지만 세탁업계는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한인이 당하는 일이어서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정씨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기 위해 애를 썼다.
세탁인들이 소송을 지켜보며 얻은 결론은 ‘한인 업주들이 고객 서비스에 미숙한 점이 많아 불필요한 분쟁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적절한 대응에 필요한 법률 정보가 없어 상황을 악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 정씨의 케이스처럼 악의적으로 사건을 확대시키는 소비자의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본의 아니게 문제를 곪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다행히 이번 바지 소송이 한인 세탁업계에 유리하게 판결이 난 만큼 고객과의 법적 갈등을 무조건 회피할 이유는 없지만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는 막자는 입장이다. 세탁협은 다음달 세미나를 열어 고객 서비스의 문제점을 집중 교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세탁업계의 자체적인 대응책 마련의 필요성 외에도 한인들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시스템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씨는 소송이 발생했을 당시 나름대로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적절한 협조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변인들이 사건의 의미와 중대성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데에 확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지금에야 분석되고 있다.
깨어진 아메리칸 드림?
잘못하면 파산할 수도 있는 상황은 전개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지만 정씨 부부는 피곤해 보였다. “아직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느냐”는 약간 생뚱 맞은 질문에 “아직 모르겠다. 당분간 쉬면서 앞일을 생각해 보겠다”고 정씨 부인은 말했다.
이들은 “만일 피어슨이 계속 세탁소를 찾아온다면 손님으로 맞아주겠다”는 말도 했다. “바지를 찾으러 오면 돌려주겠지만 자기 것이 아니라는데 오겠느냐”며 쓴웃음도 지었다. 한마디로 정씨 부부는 지쳐 있었다. 양식 있는 손님들이 “말도 안된다. 너무 걱정마라. 잘 될 것이다”며 위로를 해줘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
역으로 피어슨에게 피해 보상 소송을 제기할 의도가 있느냐는 질문에 정씨는 “그도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라며 동정을 보이기도 했다. “변호사만 사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다”며 정씨 부인은 허탈해 했다. 또 “결정된 것은 없지만 가게를 정리할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이민 생활 15년에 꿈에도 상상 못할 일로 고생을 겪은 정씨 부부는 소비자가 맡긴 바지만이 아니라 찢기고 상한 자신들의 마음을 추슬러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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