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 다녀오는 사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와인이 엄청난 붐”이라는 것이다. 소주, 맥주, 양주를 주로 마시던 한국의 술 문화가 완전히 달라져 지금은 어딜 가도 와인을 마신다고 하였다. 실제로 와인 소비가 대폭 늘어 지난해 와인 판매량은 2002년보다 50% 이상 증가했고, 특히 젊은 층에서 와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곳곳에서 와인바가 성업 중이며, 와인을 모르면 대화에 끼지도 못한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내 주위에서도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나가 와인 비즈니스에 뛰어든 사람이 여러명이고, 바로 얼마 전까지도 와인에 관심 없다던 친구들이 갑자기 찾아와 “와인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는 일도 심심찮게 겪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와인 열풍은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와인 열기가 날이 갈수록 뜨거워져 바야흐로 다음번 대선 구호는 “문제는 와인이야, 바보야.”(It’s the Wine, Stupid.)가 되지 않을까 걱정마저 된다.
한달전 월스트릿 저널은 ‘와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Wine)이란 제목의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연방주류담배세거래국(ATTTB) 통계를 인용한 이 기사에 의하면 현재 미전국의 와이너리 수는 5,110개로, 50개주 모두가 ‘제2의 나파 밸리’를 꿈꾸며 와인산업을 확장하고 있다.
2006년 한 해 동안에만 텍사스 주에서는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4개가 오픈했고, 콜로라도 주는 48개에서 70개로 늘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도 18개가 새로 생겼다. 몬태나 주에 10개, 루이지애나 6개, 메인 주 5개, 심지어 알래스카에도 와이너리가 5개나 있다고 하니, 나라와 민족을 떠나 와인의 인기는 열풍을 넘어선 ‘광풍’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도대체 왜 갑자기 다들 와인일까? ‘건강에 좋아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열기다.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이 되면서 유럽의 식문화가 보편화된 것도 한 이유겠지만 돈이 많아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이 또 다른 원인일 것이다. 요 몇년새 한없이 고급화되는 식문화를 보고 있자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일인당 100~200달러짜리 코스 디너는 보통이고 각 코스마다 와인을 페어링 해주는 수백달러짜리 식사에 자리가 동이 날 만큼 먹고 마시는 일이 갈수록 호화로워지고 있다.
이로 인해 연출되는 귀족적인 분위기와 사교적인 환경, 남들보다 격상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과시욕도 중요한 원인이라 여겨진다. 사실 유럽에서는 와인이 식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격식을 따지지 않거니와 평범한 물잔에 따라 마시거나 물을 타서 마시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반면 한인들의 와인동호회에 가보면 잔의 모양을 따지고, 어디를 잡느냐로 시비하고, 한손으로 따를지, 잔을 들어올려야 하는지 등등, 사실상 와인을 즐기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집중적인 화제의 대상이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대화에 빠지지 않으려고 와인 공부와 매너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와인을 많이 마셔보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한 탓에 맛도 잘 모르면서 말로 다 마시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이제는 와인을 모르면 술자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실제로 한 경제연구소 설문조사 결과 한국의 기업CEO 5명중 4명 이상(84%)이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좋은 술 골라보라’든가 와인에 관한 대화에 끼지 못할 때 심하다는 것이다.
내 주위에서도 와인을 마시자고 하면 “잘 몰라서…”라며 머쓱해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알고 모르고가 어디 있나. 와인은 술이다. 스트레스의 대상이나 공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이다. 단언하건대 와인을 ‘잘’ 알려면 돈이 무한정으로 많이 들고, 시간은 전 인생을 다 바쳐도 모자라며, 몸은 알콜에 찌들어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와인을 어떤 매너로 마시느냐가 아니라 와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와인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그 맛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즐기다 보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다 보면 더 잘 알고 싶어지고, 잘 알게 되면 더 친해져서 자연히 좋은 취미,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 순서를 거꾸로 하려 할 때 와인은 술이 아니라 스트레스 덩어리가 될 것이다.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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