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륨을 초유체로 전이시키면 블랙홀과 거의 흡사한 현상 나타나
방출에너지 스펙트럼 분석 통해 공간의 추가 차원 여부 파악 가능
블랙홀을 만들어라. 우주의 차원이 보일 것이다.
초끈이론은 우리 우주가 시·공간 4차원이 아닌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가정한다. 우주 생성 초기 존재했던 나머지 차원들은 아주 작게 말려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이 이론은 우주에 존재하는 입자와 힘을 ‘끈’이라는 기본단위로 통합하는 대통일이론 후보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작게 말려있는 차원’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렵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최근 실험실에서 블랙홀과 흡사한 성질을 띤 ‘유사 블랙홀’을 만들면 우리 우주가 4차원인지 또는 그 이상의 고차원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이론 연구 결과가 나왔다. 포스텍(옛 포항공대) 내 아태이론물리센터에 젊은 과학자로 초청돼 연구활동중인 중국 물리학자 시안휘 거 박사와 이화여대 김성원 교수팀은 유사 블랙홀에서 방출하는 ‘호킹 복사’의 스펙트럼을 관측하면 공간의 추가 차원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최근 영국 과학전문지 <뉴 사이언티스트>에 보도된 이들의 연구 논문은 세계적인 물리학 학술지 <피직스 레터 B>에 곧 게재될 예정이다.
블랙홀 같은 초음파 블랙홀
유사 블랙홀이란 실제 블랙홀은 아니지만 블랙홀과 똑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헬륨의 온도를 절대온도 0도(영하 273도)에 가깝게 떨어뜨리면 초유체(점성이 전혀 없어 마찰 없이 영원히 회전할 수 있는 유체) 현상이 나타난다.
초유체를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면 음파가 회전하는 유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갇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밀도가 너무 높아서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는 블랙홀과 거의 흡사해 유사 블랙홀이라 한다.
’초유체 초음파 블랙홀’을 이용해 블랙홀의 특성을 대신 연구할 수 있다는 이 아이디어는 1981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윌리암 운러 교수에게서 처음 나왔다. 우주에 존재하는 블랙홀은 실제 관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험실 속의 블랙홀’을 찾아낸 것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블랙홀에서 나타나는 여분의 차원
거 박사는 운러 박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만약 우리 우주의 시공간이 4차원보다 크다면 유사 블랙홀에서도 반드시 여분의 차원이 발견돼야 한다는 결론을 이론적으로 이끌어냈다.
빛조차 삼켜버리는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한다는 통념과 달리, 적외선 같은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를 호킹 복사라 한다. 유사 블랙홀도 마찬가지다. 유사 블랙홀에서 나오는 호킹 복사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면 우리가 몇 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차원에 따라 스펙트럼의 패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 우주가 정말 몇 차원인지 궁금증에 사로잡힌 물리학자들은 이미 막대한 돈과 정력을 쏟아왔다. 건설비만 2조원 이상이 투입된 유럽가속기연구소(CERN)의 거대입자충돌가속기(LHC)가 곧 가동되면 양성자보다 작은 초미니 블랙홀이 생성될 것인지, 이에 따라 초끈이론과 고차원 우주가 맞는지를 확인하려는 물리학자들이 학수고대하며 지켜보고 있다.
군산대 물리학과 김상표 교수는 유사 블랙홀을 이용하면 가속기를 짓지 않아도 실험실 안에서 추가 차원의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사 블랙홀 만들기
대형 가속기보다 단순하다고 해서 유사 블랙홀 만들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다. 운러 교수가 아이디어를 내놓은 지 30년이 돼 가지만 아직까지 어느 실험실에서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
먼저 액체 질소를 이용해 헬륨의 온도를 낮춘 뒤 부피를 팽창시켜 절대온도 4.2도까지 낮추면 헬륨은 기체에서 액체로 바뀐다. 이후 절대온도 2.2도 이하가 되면 액체 헬륨 일부에서 초유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엄정인 전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는 하지만 초유체로 전이되지 않은 다른 헬륨들은 오히려 점성이 더 커지기 때문에 이를 절대온도까지 떨어뜨리기는 더욱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초유체 실험을 위한 장비도 가속기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대학 강의동이나 상가건물 정도로 크다.
하지만 가속기 같은 대규모 공사에 익숙해져 버린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사 블랙홀 만들기에 달려들지 모른다. 세계 최대 연구 중 하나인 가속기가 기대했던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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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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