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인 타운의 전설적인 식품점 아리랑 수퍼가 마침내 문을 닫았다. 시카고에 이민이 몰려들기 시작 하여 한인 타운을 형성한 클락 가에 1967년 문을 연 아리랑은, 한인 타운이 로렌스 에비뉴로 이동하자 1985년 함께 로렌스로 이사를 했다. 아리랑은 로렌스에 한인 최초의 자체건물을 짓고 22년 동안 영업을 해오다, 지난주 물건을 완전히 정리하고, 15일 5/3은행에 건물을 넘겼다.
시카고 이민사의 애환을 함께 해온 한인 타운의 명물, 아리랑은 40년 역사를 뒤로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미국인들의 비즈니스가 3대 5대까지 자자손손 승계되고,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곳도 수두룩하지만, 기복이 심한 우리에겐 40년 한 길도 쉽지 않은 기록 이다.
아리랑의 전성기는 70년대 80년대다. 당시 클락가의 아리랑은 단순한 그로서리가 아니었다. 일주일간 열심히 일하고, 온 식구가 함께 맛있는 식품을 사러가는 주말 장터였다. 장터인 만큼,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즐거운 수다도 떠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일 년 열두 달, 365일 어김없이 주인 박영기 박연희 부부가 캐시 레지스터를 지키고 있었다. 만나당(홍두영), 클락 마켓(이광희, 이회근, 황정융) 등이 있었지만, 경쟁상대로는 약했다. 아리랑은 그때 돈도 많이 벌어 코리아 하우스 등 근처의 건물 7개를 매입했다.
이민 초기 거의 모두가 열심히 일 했지만, 박씨 부부야말로 부지런히 일만 한 사람이다. 정월 초하루에도 문을 닫지 않고 가게를 열었다. 기자는 생전에 주인 박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낮에는 죽어도 한가한 시간이 없다기에 가게 문을 닫고 배달까지 끝낸 후 만났다. 식당에서 저녁 9시가 지나서 만났는데, 식당도 닫을 시간이었다. 평소 캐시 레지스터 앞에 서 있는 박씨는 ‘포레스트 검프’의 ‘탐 행크스’ 처럼 어눌하고 감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막상 만나서 사업, 이민, 가정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니 보기와는 달리 주장이 분명하고 심지가 쾌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자와 면담하는 것 같은 것은 계면쩍어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나와의 면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기자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아이들이 한참 자랄 나이에 맥도날드 한 번 같이 못 데리고 갔다고 한다. 한 번은 인디애나에 배달을 갔는데, 주문한 두부를 빼놓고 와서 다시 두부 한모를 배달하러 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박씨는 독일 광부 출신이고 부인은 간호사 출신으로 시카고에서 결혼 했다. 결혼식 날에도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벌어졌다. 결혼식이 오전11시였는데 일에 열중하다 늦어 넥타이도 메지 않고 식장에 달려가 남의 넥타이를 빌려 메고 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는 지독한 사람이다. 식품점을 하기 전에는 하루 세 직장을 다녔고, 신선한 생선을 가져오기 위해 캐나다 토론토를 당일치기로 뛰었다고 한다. 한성고등학교 다닐 때 럭비선수였다는 그의 건강이 이를 지탱해 준 것 같다.
시카고 식품업계의 아리랑 독주 시대는 95년 주인 박영기시가 사망하고, 중부시장이 생기면서부터 끝났다. 그나마 지방에 도매, 식당, 양로원 등의 단골을 확보해 버티어 왔는데, 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대형 마트의 진출은 박연희씨 혼자의 힘으로 더 이상 지탱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재고품 9컨테이너를 택사스로 다 보내고 텅 빈 가게에서 기자와 만난 박씨와 새로 결혼한 홍씨는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소감을 묻자, “제일 어려웠던 것은 중부시장이 생겨 가격경쟁을 할 때이고, 제일 보람 있었던 것은 40년 인생이 담긴 마켓에서 한 가족처럼 변함없이 늘 찾아오는 고객들과 담소 할 때가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꼭 돈을 벌기위해서라기보다 식품 파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요”라고 말했다.
나 역시 40년 가까이 아리랑 수퍼마켓을 드나들던 고객으로 문 닫은 가게를 보면서, 80년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버트 풀검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집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II I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라는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풀검 목사는 그의 단골 이발사가 이사를 가자 더 이상 그에게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집안의 누가 죽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머리털은 한 달에 반 인치 가량 자라는데, 그 이발사는 16년 동안 자신의 머리를 8피트 가량 깎아준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지는 않지만, 이발사건 식료품 주인이건, 또 수리공, 교사, 주치의, 이웃사람 누구든 늘 ‘그곳’에 있고 작지만 소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착한 사람이면 삶의 일상성에서 우리를 승화시켜준다”고 설명했다.
아리랑 박연희 사장! ‘깨끗하고 신선한 식품을 한인사회에 제공 하겠다’는 모토로 40년늘 ‘그곳’에 있었던 당신의 한결같은 외길 인생은, 우리가 말은 안 하지만, 당신이 생각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여깁니다. 미스터 홍과 함께 이제 여가도 즐기시고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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