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어떻게 제국주의 칼날 피해갔나
태국왕들 16세기부터 선진문물 적극 수용
외부서‘문명국’존중 조선말기 우리와 대비
-문학의 힘: 노벨평화상
필자가 최근 근무한 노르웨이가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나라인 것은 대부분 알겠지만 노벨이 자기 조국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로 하여금 매년 평화상을 수여하도록 기금을 배정한 연유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에도 문화의 힘이 컸다. 노벨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 중에서도 1800년대 말 당시 사회개혁이나 여성해방 등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 노벨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비요른슨 등 당시 노르웨이 작가들이 이런 사회문제를 소설을 통해 앞장 서 제기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스웨덴 치하에 있던 노르웨이에 대한 정치적 배려도 있었겠지만 노르웨이의 문학에 심취하지 않았던들 그런 결정이 나왔을지 의문시된다는 견해가 많다.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이 전 세계인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이나 입센의 ‘인형의 집’이 20세기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이 된 점 등 문학이 인류역사 발전에 드리운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필자는 주 노르웨이 대사를 하면서 아이슬랜드 대사도 겸직하여 1년에 두어 번은 아이슬랜드를 방문했다. 2002년 가을 노르웨이에 부임한지 한 달도 안 되어 우리 외무장관이 아이슬랜드를 방문하게 되어 신임장도 안낸 상태에서 레이키야빅에 가게 되었다. 아이슬랜드에 관해 알아보던 중 인구 35만의 이 나라에도 할도르 락스네스(Haldor Laxness)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품 ‘불굴의 인간들’(Independent People)을 읽으면서 고립된 극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인간 세계에 대한 수준 높은 문학적 고찰에 놀라게 되었다. 이 나라가 1,000여년간 고립된 생활과 수백년의 덴마크 지배 하에서도 고유 언어와 민족적 통합을 유지하고 결국 독립을 쟁취한 바탕에는 문학이 있었음을 느꼈다.
-미술의 힘: 다빈치의 ‘족제비를 안은 여인’
폴란드인들의 자기 문화 보존 노력은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1989년 자유노조가 의회를 장악한 후 사실상 공산체제가 붕괴됐다. 미국 대통령(부시)이 역사상 처음 1991년 폴란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1989년 6월 폴란드 자유노조(solidarity)의 의회 장악은 자유를 갈망하는 폴란드 국민, 600만여 폴란드계 미국인, 미국인과 미국 정부의 합심 노력이 빚어낸 승리였다. 미국은 앞장서 폴란드 경제 재건에 나섰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가 소련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자신들의 뿌리인 서구 문화권에 편입되는 것을 비로소 실감시키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일이었다. 폴란드 정부와 국민들은 최대의 예를 갖추어 영접준비를 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바웬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한 수십억달러의 원조와 자유 민주체제 수호를 약속했다. 다만, 부시 대통령은 한 가지 조그만 요청을 곁들였는데 그것이 폴란드 정부와 국민을 난감하게 하였다. 그 요구란 폴란드 제2 도시이자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 중심지인 크라코프(Krakow)시의 차르토르스키 박물관(Czartoryskich)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Lady with an Ermine, 40.3× 54.8cm, 호두나무판 위에 유채)을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하도록 두 달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폴란드가 국토 상실과 전쟁 등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00년 이래 소중히 간직해 폴란드 땅을 떠나 본적이 없는 폴란드인들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공산체제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을 지향하도록 열렬히 도와준 미국이 다만 그림 한 점을 두 달만 빌려 달라는데 이를 거절할 명분 또한 없었다. 수개월간의 격렬한 국민적 논쟁 끝에 드디어 응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폴란드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응하면서 조건을 하나 내놓았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그 조그만 그림을 모셔갈 특별기를 보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은 기꺼이 응하였다. 미국 정부도 폴란드 국민들이 수백 년간 아껴온 그 그림, 아니 폴란드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당시 미국은 자유 폴란드의 미국에 대한 우정을 시험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국가간 격조 높은 외교적 거래에 고개가 숙여졌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남쪽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체스트호바 시 성당에는 ‘블불랙 마돈나’라는 검은 피부의 성모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을 찾는데 그 그림이 언제부터 그 성당에 있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수백여년 전에 중동지역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며 폴란드인들의 정신적 상징이 되어 왔다. 1700년대 스웨덴과의 대 전쟁에서도 그 그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 그림을 지금까지 잘 보존한 덕분에 오늘날 폴란드가 국권을 회복하고 공산주의에서도 벗어났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그 그림은 평소 커튼에 가려져 있다가 미사시간이 되면 음악과 함께 커튼이 걷히면서 절반은 은장식으로 덮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림 하나에 국운이 걸린 듯 여기는 폴란드인들의 모습에서 미신적 느낌도 받지만 그림 하나가 갖는 문화적 상징성이 뚜렷하기만 하다.
1989년 봄 바르샤바에서의 수교 교섭을 마친 뒤 폴란드 측은 ‘미술작품으로 본 폴란드 역사’라는 책을 선물로 주었다. 중세 독일 기사단과의 전투, 15~17세기 프러시아 및 스웨덴 등과의 전쟁, 1700년대 입헌군주제 헌법 제정 장면, 국권상실 시대의 삶, 쇼팽의 모습, 볼셰비키와의 전쟁 등 수백년간에 걸친 민족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명작 그림들을 수록한 책이다. 폴란드 민족사를 미술작품을 통해 한 눈에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었다. 그 후 3년여의 폴란드 근무는 미술관과 화랑 등 전시장을 찾거나 예술가들과의 교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문화예술이 갖는 정치사회적 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다빈치 등 인류사에 막대한 영향
문학·예술의 힘이 곧 민족의 힘 보여줘
-음악의 힘: 오페라 ‘Nabuco’
바르샤바는 영화 ‘피아니스트’가 그린 것처럼 2차 대전 말기 폴란드 지하 저항세력을 말살하려는 독일군의 계획적 도시 파괴작전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다. 1945년 종전 후 폴란드는 카네레토의 18세기 바르샤바 시가지 그림을 참조, 왕궁을 포함한 옛 시가지를 4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완전 재건하였다. 오페라 하우스도 1980년대에 들어 현대식으로 재건해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와 쌍벽을 이루는 시설을 자랑한다.
공산 폴란드 정부는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저렴한 가격에 수준 높은 음악을 국가가 제공하기도 했다. 폴란드 근무 중 자주 오페라 극장에 갔다. 1990년 가을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공연이 시작돼 첫날 공연(프리미어)을 관람하였다. 말이 무대에 뛰어나오는 등 웅장한 규모를 과시하는 공연 중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장면에서 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산국가 시절에는 이 오페라가 폴란드가 소련의 노예라는 인상을 퍼뜨릴까 우려해 금지된 작품이었고 자유 폴란드 첫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 때문에 오페라 공연은 잠시 중단되었다. ‘노예들의 합창’은 그 자리에서 다시 불러졌는데 모든 관중이 일어서서 눈물로 합창을 하였다. 그 순간 폴란드인들은 되찾은 자유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새기며 다시는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는 듯했다. 음악을 통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제3국인인 필자로서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1990년 봄 소련 연방시대와 1991년 봄 소련 연방 말기에 각각 모스크바 출장길에 볼쇼이 극장을 찾았다. 불과 1년 사이 소련 연방의 쇠퇴와 볼쇼이 극단의 질적 수준에 많은 차이를 느꼈다. 극장의 유지관리 상태뿐 아니라 오페라 가수와 악단의 수준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라가 쇠퇴하니 유명 연주자와 가수들이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음악의 힘은 나라의 힘이고 나라의 힘은 또 음악으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문화 선각자들: 왕과 나
1990년대 후반 필자는 태국에 근무하면서 문화의 힘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태국은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에서 희생물이 되지 않고 주권을 유지한 매우 드문 나라다. 국민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인근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 모두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태국만 주권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국은 중국 운남성 접경지역에서 왕조가 발상하여 점차 남진하면서 1300년대에 들어 현재와 비슷한 통일 국가를 이룩했다. 태국 국왕들은 타국의 문화를 배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1500년대에는 일본과도 상당한 교류를 하였다. 1600년대에는 유럽과 교류는 물론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1900년대 초에는 영화 ‘왕과 나’에 등장하는 왕의 아들(출라롱콘 대왕)이 즉위하여 서구 문물을 배우고자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을 공식 순방했다. 노르웨이 방문 중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최북단 북극권에까지 찾아가 기념비까지 남겼다.
귀족 자녀들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젊은이들을 유럽에 유학 보내 선진문화를 배우게 한 뒤 국가 요직을 맡겼다. 마치 일본이 명치유신 후 2,000여명을 유럽에 유학 보내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게 한 것을 연상시킨다. 교류는 어디까지나 왕실 중심의 귀족층에 한정되었기에 그 영향은 국가적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류를 통해 유럽 국가들은 동양에 중국, 일본과 더불어 태국(Siam)이라는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과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교류해 온 태국 왕실을 제국주의 시대에도 존중해 식민지배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말 대원군 등의 서양문물 배척운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생각하면 국가 지도자들의 선진문화에 대한 인식이 국운을 결정한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 ‘족제비를 안은 여인’(1480년대작, 40.3× 54.8cm, 호두나무판에 유채). 다빈치가 그린 세장의 여자 초상화의 하나로 그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모나리자보다 20년 앞서 그린 작품으로 역사상 최초의 현대식 초상화이다. 폴란드의 차르토르스키(전 왕족)가 1800년에 이탈리아에서 구입해서 크라코프로 가져왔다.
<최병효 LA 총영사>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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