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저물며 서서히 땅거미가 내릴 때쯤이면 버릇처럼 집을 나선다. 빛과 어두움이 교차되는 시간. 사물이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이 저물녘의 산책을 나는 좋아한다.
전에는 주로 아침시간에 걸었으나 언제인가 노을의 황홀경에 취한 이후부터 해질 무렵이면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충동이 인다. 진주빛 분홍과 선홍색의 노을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차츰 검붉은 잔영을 남기며 스러져가는 빛의 그림자 속에 빠져듦도 좋다. 어스름이 안개처럼 퍼지기 시작하면 별이 하나씩 눈을 뜨듯이 여기 저기 주택가에서 빛이 살아난다. 세월 저편, 어느 창가에서 보았던 감동의 불빛이 그리움 되어 어른거리는 것도 이 저물녘이다.
우리 가족이 영국에 살 때이다. 우리가 자리한 곳은 ‘선버리 언 테임즈’(Sunbury on Thames)로 런던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도시였다. 집을 소개하는 사람의 권유로 그 곳까지 들어갔는데 안정감 있는 조용한 주택가였다. 우리가 살던 집은 지은 지 127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바람이 심한 겨울에도 틈새가 없는 견고한 집이었다.
그 동네의 집들은 모두 고색창연하여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몇 백 년은 족히 됨직한 고목이 집 앞 양쪽 길에 가로수처럼 이어져 있고 울창한 잎들이 아치를 만들고 하늘을 덮어 터널을 이루었다. 그때 남편은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늦는 날이 많았기에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저녁을 차려 주고는 황혼녘이면 동네를 걸었다. 5분 남짓 내려가면 테임즈강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다.
어느 날이었나, 처음으로 강변길 ‘서나 가든즈’(Suna Gardens)를 따라 걷다가 우연히 창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노부부를 보았다. 자주색 우단과 흰색 레이스가 겹쳐진 커튼이 보기 좋게 드리워진 창가였다. 촛불이 식탁을 밝혀 주어서인지 실내가 아늑해 보였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하는 그들은 표정이 무척 평화로웠다. 그들의 식사는 내가 1시간 남짓 걷고 다시 그 창가를 지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연상될 정도로 행복스런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하도 멋져,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촛불을 켜놓고 식사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아마도 특별한 날이리라. 생일이거나 결혼기념일 쯤 되겠지.
다음 날도 여전히 그들은 촛불을 밝혀 놓고 식사하고 있었다. 이따금 웃는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창가의 식사는 그들이 평생을 그 집에서 살며 보여주는 일상이라는 것을 그 앞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저녁 산책은 그 창가를 보기 위해 나서는 것 같았다. 남의 집안을 들여다보거나 기웃거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붉은 벽돌담에 보기 좋게 얽혀 있는 담쟁이덩굴과 창가에 우아하게 늘어져 있는 커튼, 촛불과 노부부가 아주 잘 어울려 그 곳을 지날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씩 바라본다. 실례인 줄 알면서 고개가 저절로 돌려짐을 어쩔 수 없었다.
노부부의 식탁을 보기 전까지 촛불은 전기대용이라 생각했다. 가끔씩 정전이 되던 시절에 살았던 나는 촛불은 빛을 밝히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쩌다 외국 영화를 볼 때면 촛불이 놓인 식탁을 보았으나 그것은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실제 생활에 연관 지어 본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우연히 바라보게 된 그 정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도시에 살면서 어느 듯 나도 초에 익숙해져 갖가지 예쁜 모양의 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정전의 대용으로 알았던 내 의식에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장식품이 없다고까지 변하게 되었다.
나도 촛불을 밝혀 놓고 저녁식사를 하고 싶었다. 꽃으로, 촛불로 집안을 멋있게 장식하고 남편을 기다리는 날이면 으레 출장자들로 인해 귀가가 늦었다. 우연히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밝혀 놓은 촛불을 보며 감격하는 남편의 모습이 보고 싶었으나 결국 몇 번의 기회를 놓치고부터는 우리 가족들만을 위한 빛나는 식탁의 꿈은 흐려져 버렸다.
나이 들어가며 식사시간이 묵상시간처럼 되어버린 우리 부부를 느낄 때면 서나 가든즈의 어느 창가가 떠오른다. 일상의 나날을 특별한 날처럼 넘치는 행복 속에 살아온 노부부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삶이었나를.
나는 매일은 아니지만 흐린 날이면, 음악과 빗소리가 어우러지는 날이면, 손님을 맞게 되는 때면 촛불을 켠다. 그리고 친구가 보내준 지리산 화개골의 ‘예전차’를 준비한다. 촛불의 분위기에서 마시는 차라면 커피보다는 우리의 전통차가 제격이다. 차향에 스며드는 초의 향기, 초속에 녹아드는 차향이 은은할 때쯤이면 서나 가든즈의 불 밝던 창가에서 행복한 모습을 선사해 주던 노부부처럼 행복해진다.
스스로 자신을 태워 빛을 발하는 한 자루의 촛불을 바라보며 깊고 은은한 차향을 앞에 놓고 마음 따뜻한 사람과 함께 하는 날,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으리라.
해질녘이면 서나 가든즈의 노부부는 촛불을 밝히며 내게 온다.
<유숙자>
약력: ‘수필문학’ 등단. 크리스찬문협, 한국문협,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현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수필집 ‘백조의 노래’(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년도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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