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체스토코바의 ‘검은 마돈나’.
최병효 LA 총영사
대제국 몽골, 문화엔 정복당해 자취 소멸
1. 국가간 분쟁의 근본 요인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동서 냉전이 끝나자 이제 인류는 유사 이래 최고의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가 국제사회에 팽배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였음이 곧 드러났다. 후 냉전시대(Post Cold War)로 불리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평화에 대한 위협의 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하버드 대학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가 1993년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지에 ‘문명충돌’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했다.
중국은 문화적 우위로
정복자들 흡수하며
지금까지 정체성 유지
1700년대 후반부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유럽 국가 사이에는 부국강병을 위한 중상정책이 최고의 국가정책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수탈전쟁과 무역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사상(이념)이 국가간 분쟁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는 이제 사상논쟁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문명이 국가간의 분쟁을 불러오는 새로운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화는 culture, 문명은 civilization으로 쓰인다.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 언어, 전통, 관습, 제도, 종교, 역사, 교육 등 분야별로 구분되는 분야별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각 분야별 문화를 종합해서 그냥 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명은 이 모든 문화를 객관적으로 공유하고, 주관적으로도 구성원들이 일체감을 느끼는, 나아가 지역 개념까지 포괄하는 가장 광범위한 문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문명은 보통 한 나라 이상의 광범한 지역적 범주를 포함한다. 중국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문명으로 봐야 하며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많다. 미국도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점차 독자적 문명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로마제국도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문명이었고, 대영제국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인들이 미국에 처음 와서 대부분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미국도 한국처럼 한 나라로서 공통의 문화권 속에서 사는 곳일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국을 한 나라라기보다는 여러 문화권을 포괄하는 하나의 문명으로 인식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123년간 종속불구
언어 지켜낸 폴란드
문화적 자부심 대단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문명간 교류가 늘고, 상호 이질적인 가치관을 가진 국가간에 충돌 가능성도 커지며, 문명권 내부의 종교적 결속력이 커져 타종교에 대해 더욱 배타적이 된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문명간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상호 이해도가 늘어나 국가간 충돌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도 있다.
문명은 그 요소와 구성 정치체(political entity)가 보통 복수로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문화와는 달리 정치 종교적인 복합적 요소가 강하므로 이 글에서는 순수한 문화적 관점에서 문화의 힘을 말하려고 한다.
2. 문화와 제국(Culture and Empire)
인류 문화사를 구분할 때 이집트-그리스-로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디스강 등 4대 고대문명발상지를 흔히 언급한다. 이들 4대 문명은 각각 이 문명에 기초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알려진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다른 역사적 제국과 달리 오늘날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는 몽골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정복 대상보다 뛰어나지 못해 정치적으로는 정복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정복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몽골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의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우수한 문화와 인적 자원으로 정복자들을 오히려 흡수함으로써 중국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로 문화의 힘이 무력보다 강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수준 높은 문화가 없는 제국은 진정한 제국으로 남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적 힘도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영향력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당대 문명 중심은 미국
그 속에 새 둥지 튼
한인들 장래 밝다 생각
헌팅턴 교수는 세계 문명을 서구, 유교, 일본, 이슬람, 힌두, 슬라브-그리스 정교, 중남미, 아프리카 등 8대 문명으로 구분지었다. ‘역사의 연구’라는 대저술을 펴낸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 문명을 더 세분하여 21개 문명으로 나누었다. 서양에서는 일본을 중국 중심의 유교문명권보다 더 나아간 독자적인 문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을 과소평가해 온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도 역사상 다른 제국들과 같이 언젠가는 쇠퇴하겠지만 인권,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지금까지의 어떤 제국들보다도 더 우월한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과거 제국들보다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지고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 문명의 중심권을 인식하고 거기에 새 둥지를 잡은 미주 한인들의 통찰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민족의 장래를 밝게 볼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3. 문화의 힘(Power of Culture)
-인종 그리고 종교
문화가 어떻게 그 위력을 발휘하는가,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백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계(일명 WASP)가 주도하는 사회라고 한다. WASP은 유럽이라는 지역의 인종과 종교에 기반을 둔다. 인종은 그 자체로는 문화라고 할 수 없으나 유럽에 주로 사는 백인들이 근세 인류 문명을 주도하면서 백인은 문화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내부적으로도 우월적인 문화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WASP이 미국을 주도한다는 것은 서유럽 기독교 문화가 미국을 주도한다는 뜻이다. WASP은 미국을 주도함으로써 사실상 세계를 주도하는 셈이다.
문화의 힘은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양인들도 과거 중국이 세계 문명의 한 중요한 축을 이룰 때에는 우수한 인종으로 자부하였다. 불교도 선진 종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럽 산업혁명 이후 서구문명 시대로 들어선 이후 한때 동양인은 미개인 대우를 받거나 불교는 미신의 지위로 전락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동양인 이민금지법이 1965년까지 발효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한·중·일의 경제발전에 따라 과거의 우수한 동양문화가 재발견되었다. 동양인도 세계의 우수한 인종으로 재인식되고, 불교도 기독교와 더불어 문화종교로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인종이나 종교 그 자체로는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필자는 외교부 동구과장으로서 이른 바 ‘북방외교’라는 대 공산권 관계정상화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한국과 폴란드가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1989년 11월 폴란드 한국대사관 개설업무를 주도하고 내친 김에 3년여를 근무하게 되었다. 부임 1주일도 안 되어 우리 국회 외무위원장 등 의원단의 폴란드 공식 방문을 주선하게 되었다. 폴란드 의회의 의전관 코노파츠키 대사가 방문 일정에 관해 많이 도와줬다. 당시는 89년 6월 자유노조가 총선에서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였으나 대통령은 공산당의 야루젤스키 제1서기가 맡고 있었다. 고위 공무원들도 대부분 아직 공산당원이었다. 코노파츠키 대사도 물론 공산당 소속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갑자기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인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공산당원은 교회에 가지 않는다”던 그의 장례식장은 의외로 공동묘지 내의 성당이었다. 신부는 장례미사를 10분도 안 걸려 무성의하게 끝냈다. 주위에 사유를 물으니 신부가 공산당원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왜 성당에서 장례식을 하는가 물으니 아무리 공산당원이라도 평생 두 번은 성당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태어나면 성당에 가야 이름을 짓고, 죽어서는 성당 말고는 장례식을 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라도 뿌리 깊은 폴란드의 기독교 문화 전통마저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1988년 폴란드와의 수교 교섭 차 바르샤바에 갔을 때 필자는 그곳에 성당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정복 차림 군인들도 지나가면서 성당에 들러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 아무리 강고해 보이는 이념도 천여년의 뿌리 깊은 종교를 이기지는 못하니 그 멸망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언어의 힘: 폴란드, 123년만의 부활
미국의 저명한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Michner)의 소설 ‘폴란드’를 읽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폴란드는 유럽에서도 가장 극적인 역사적 운명을 겪은 나라이다. 폴란드는 1700년대 말에 유럽 최초,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공화제 성문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절대왕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당시 유럽 강국들이 입헌군주제가 유럽에 퍼지는 것을 우려해 폴란드를 나누어 합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세 나라에 분할 합병되었던 옛 폴란드 지역이 마치 형상기억 합금처럼 다시 하나의 나라로 합쳐 독립했는데 실로 123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35년 동안 우리가 고유의 언어와 문화 유지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생각하면 123년 동안 세 개의 나라에 분할 합병되었던 과거의 폴란드가 폴란드어를 쓰는 하나의 국가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순전히 그 오랜 세월동안 고유 언어를 유지하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잃지 않았던 덕이라고 생각된다.
폴란드는 1400~1600년대 한때 모스크바도 점령한 바 있었던 군사·문화적인 강국이었다. 그러한 자부심과 자신감 때문에 123년간 고유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지속돼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1800년대 말 러시아 치하 바르샤바에 살던 마리아 스코우도프스카(노벨화학상을 받은 큐리 부인의 본명) 여사가 중등학교 시절, 폴란드인 담임교사는 금지된 폴란드어를 몰래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러시아 장학관이 예고 없이 학교에 시찰오자 모두 폴란드어 책을 숨기고 러시아어 책을 읽는 체 한다. 러시아 장학관은 누군가 러시아 황제의 칙령을 외워보라고 하자 그 교사는 명석한 스코우도프스카를 시킨다. 장학관은 유창한 러시아어에 만족해 칭찬하고 떠난다. 그 후 교실은 학생과 교사 모두의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과거 한국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저자 센키에비치를 비롯, 아담 미츠키에비치, 싱클레어 등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배출한 폴란드 인들은 모두가 시인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 말과 문학에 대한 사랑이 깊다. 이러한 모국어에 대한 사랑은 국가적 위기에는 커다란 국민적 응집력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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