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청포도’)
‘무향거’김봉화 관장 직접 천에 물들이고
한뜸한뜸 바느질한 작품들 14~30일 특별전시
모시란, 청포도 익어가는 칠월에 흰 돛단배 타고 오는 귀한 손님을 맞는 마음으로 은쟁반에 담아 올리는, 그립고 정결한 것이다.
세모시란, 옥색치마 입고 그네 탄 여인네가 창공을 차고 오를 때 제비도 놀라서 나래 쉬고 바라보는, 아련하고 눈부신 것이다.
깨끗하고 은은하고 섬세하고 기품 있고 가볍기가 마치 잠자리 날개 같아서, 우리 것 지킴이 무향거(관장 김봉화)는 이 모든 형용사가 무색한 전시회 ‘모시: 잠자리 날개 같은’(mosi: transparent)을 연다. 김봉화씨가 직접 천에 물들이고 쟁을 쳐서 한 뜸 한 뜸 바느질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특별한 전시회. 14일부터 30일까지다.
모시의 아름다움은 비침에 있다. 한 여름,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살포시 비치는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의 모습처럼 기품 넘치면서도 이를 데 없이 섹시한 옷감이 모시 천이다.
그 얇은 천으로 무슨 작품을 만들려나 했는데 작품들을 직접 보니 눈이 부시다. 발, 상보, 이불보, 식탁 러너, 다기 받침, 옷, 장식용 소품 등 어찌나 색이 곱고 바늘땀이 정갈한지 하나하나 보는 것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은 작품이 한 달, 발이나 이불보 같이 큰 작품은 꼬박 두세 달 걸려 만든다고 하니 이 전시는 그녀의 숨과 결, 혼과 세월이 배어있는 전시회라고 봐야겠다.
김 관장에 따르면 모시는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천이다. 저마로 천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린넨이 모시가 아니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린넨은 모시가 아니다. 정확히 설명하면 모시는 저마로 만든 것이고, 삼베는 대마로 만든 것이며, 린넨은 아마로 만든 것이다. 영어로는 모시가 ramie, 삼베가 hemp, 그리고 linen이다.
모시는 우리 한민족의 삶과 함께 한 천연섬유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우리 조상들의 최고급 여름 옷감이었다. 모시 중에서도 세모시가 가장 고급스러운 옷감이며, 그 중에서도 발이 곱고 올이 가늘며 섬세하고 가벼운 한산모시를 최고로 친다. 사람의 손으로 짠 베 가운데 동서고금 통틀어 가장 가벼운 베가 한산 세모시라고 한다.
모시는 한포가 나오기까지 직조과정부터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지만 염색도 사람의 정성과 손끝에 따라 달라진다. 김봉화씨가 누런색 생모시에 색을 입히는 과정을 들어보자.
생모시를 하루저녁 물에 담가 풀기와 이물질을 뺀다. 공장에서 천을 짤 때 화학처리된 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염색할 염료를 정하고 염액을 만든다. 김씨가 자주 쓰는 재료는 양파껍질, 황토, 치자, 포도, 황백, 홍화, 쑥, 꽃, 차 등. 이런 것을 끓여서 고운 체에 걸러 염료를 만든 다음 천을 담그고 물이 잘 들도록 20~30분 정도 주물러준다. 물이 든 천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헹구는데 마지막 헹굼 물에 소금을 약간 넣어주면 색이 잘 안 빠지는 매제 역할을 한다. 헹군 천은 바람이 통하는 그늘에서 말리는데 완전히 마르기 전 꿉꿉할 때 걷어서 풀 먹인 다음 다림질을 잘 해야 올의 가로 세로가 바르게 선다. 날올과 씨올이 직각으로 반듯하게 만나게 천을 다루고 고슬고슬한 기운과 윤기가 나게 손질해야 비로소 천이 완성되는 것이다. 어떤 색은 이 과정을 열 번 이상 거친다. 황토 빛 천은 열 번을 했고 카키색 모시는 다섯 번 했다고 한다.
김봉화 관장은 바느질을 돌아가신 어머니를 통해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바느질을 가르치시면서도 “절대 일로 삼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바느질이건 요리건 할 줄 알아야 남도 시킬 수 있으니, 할 줄 알고 시킬 수 있을 정도만 해라”시며 오히려 말리셨다니 딸이 바느질로 밥 먹고 살게 될까 봐, 고달프게 살게 될까 봐 미리 못 박아 두셨을까? 그러니 지금은 불효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김 관장의 얼굴에서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9년 전 미국에 와서야 시작한 일입니다. 고향 떠나니 옛날 생각나서요. 한편으론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 한인들도 제대로 모르는 데다 일본과 중국 문화에 덮여서 도무지 우리 것이 구별되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한지요.”
무향거는 그런 마음으로 지난해 가을 오픈한 전통문화 갤러리다. 한인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La Brea & Melrose)에 둥지를 튼 이유도 한인타운 자리 값이 너무 비싼 탓도 있지만 미국 사회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번 모시전에는 김봉화 관장 외에도 제자 9명(최명옥, 이모니카, 박영, 이영희, 박은주, 김진숙, 안효선, 이재연, 조예진)이 만든 작품도 한두 개씩 선보인다.
오프닝 리셉션은 14일 오후 7시30분.
한편 무향거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모시 바느질 강좌를 2회에 걸쳐 개최한다. 16일(토)과 20일(수) 오전 11시~오후 1시 실시하며 참가비(재료비)는 10달러.
무향거(Folk Art Gallery CASA MUHYANG) 주소와 전화번호는 743 N. La Brea Ave. LA, CA 90038 (323)934-4992 www.casamuhyang.com
<무향거 큐레이터 조예진씨가 천연 염색된 모시 천들을 두루 말고 있다>
<김봉화씨가 전시회에 걸 모시 작품들을 꺼내 보이고 있다. 작은 것이 한달, 큰 것은 두세 달 걸려 바느질한 작품들이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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