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이해하는가?
과연 세상은 모두에게 절대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난
실체일까? 그렇다면 하나의 사회현상을 놓고 극명하게
서로 다른 시각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우리 자신들의 것일까?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는 외부세계를 의미있게 지시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사랑’, ‘행복’ 같은 추상적인
말들이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발생시키는가?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표류한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진정한 의미는 언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산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냐에 따라 오르막길일 수도
있고 내리막길일 수도 있다. 산만 놓고 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의미가 없다. 단지 자의적인 언어적 구분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언어의 덫에
걸려 있다.
인간의 모든 갈등은 원활한 의사소통과 이해의
부재에서 파생된다. 이는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사고에
객관성과 보편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수많은 담론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며 특정문화에
전체적인 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미국과 같은 다민족국가나 소위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서양의
회의주의적 시각을 따르면 우리가 굳게 믿는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단지 망상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는
인간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주관적인
시각과 언어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서양의 이성 중심적인 로고스적인 전통은 인간의
언어, 논리와 지식 체계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으며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정보매체의 발달은 인간의
지식을 해마다 배가시키고 있다. 인터넷에는 정보와 지식이
넘쳐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 결핍되고 공허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서양의 모든
경전은 과도한 지식을 위한 지식에 대해 경고한다. 노자는
인간의 인위적인 지식에 반대한다. 지식은 우리의 욕망과
결부된다. 따라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욕망의
대상을 인지하게 하며 ‘만족을 모르고(不知足)’ ‘그칠 줄
모르게(不知止)’ 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지식을
더하는 자 슬픔을 더한다고 지식을 경계하고 있다. 지식은
욕망과 결합함으로써 도구화 되며 인간의 해방이 아닌
시장지향적이며, 기술적, 행정적인 통제의 망으로
작용한다.
절대적인 진리와 지식을 내세우는 모든 행위는
결국은 권위주의와 연결되며 정치적으로 불순하다. 모든
위대한 역사적인 성취는 자체적인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붕괴된다. 서양의 계몽주의와 객관성을 중시하는 과학 역시
자기정화적인 비판적 기능이 무뎌지고 마비됨으로써
그들 역시 그들이 불합리하다고 한때 비판했던 신화의
세계를 닮아갔다. 결국, 자신들의 세계 역시 또 다른 경직된
권위주의 체계로 환원되며 스스로 파국의 길로 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재고되어야 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을 재구성한다. 헤겔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는 ‘절대적인 진리의 달성(The achievement
of absolute truth)’이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상이든 신이든 늘
절대적인 것을 동경한다. 문제는 절대성에 대한 우리들의
자의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규정과 해석이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언어와 지식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제A(正)와 명제B(反)의 대립을 통해 복수적인 것과
차이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총체론적이며 환원주의적인
변증법적 담론을 거부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언어와 지식의 경직성과 인위적인 범주화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사고의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언어와 지식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내재하는 언어와 지식의 오용과 이에 따른 모순에
있다. 우리의 언어/지식체계에 대한 치밀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통해 우리 자신의 지식과 이해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합리적인 열린 사회로 향할 수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미
없고 단편적인 과도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진지한 자아
성찰과 인간의 언어와 관념이 만들어낸 절대적인 것으로
가장되는 모든 총체적인 관념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이다.
생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철학자 들뢰즈에 의하면 철학자는
영원한 관념의 하늘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을 따라 가면서 개념을 생성해내는 사람이다. 이
우주에서 항구적으로 절대적인 모든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바로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