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살아계실 제 잘 돌봐 드리세요
사선 넘나든 북가주 원로한인의 애절한 사부곡&사모곡
- 백석(白石) 김흥(Pastor, Peter H. Kim)
본보에 최근 자살부모 많다는 충격적 기사와 위기의 부부들 시리즈가 게재되는 동안 두툼한편지 한통이 본보 편집국에 배달됐다. 산호세 거주 김홍(영어이름 피터) 씨라는 분이 보내온 것으로 62년 전 해방 당시 북한땅에서 곡절끝에 살아남고 죽음을 피해 월남한 뒤 해군에 입대해 다시 생사를 넘나들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한편으로 부모님을 그리고 또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애절하게 호소하는 내용이다. 어느덧 끝자락에 선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는 특별기획으로 김 씨의 편지를 전재한다. <편집자 주>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해방과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마음껏 외쳐불렀다. 그 때, 나는 평양 철도국 사무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무처에는 일본사람이 100여명 있었고 한국사람은 경리과에 1명과 시설과에 2명으로 도합 3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8월 16일, 나는 평상시 예정대로 아침에 출근하니 일본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우리 한국사람 3명만 출근해 있었다. 우리는 의논한 결과, 각 역의 역장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어서 각 역장들을 한 곳에 불러모으기로 하였다.
8월 17일, 각 역의 역장들이 모여서 새로 철도국장을 투표선출하기로 하고 투표에 들어가니 평북, 정주(定州)역장 곽주렴 씨가 당선되었다. 곽씨는 서울 연전(延專, 연세대학교의 전신) 나의 선배였다. 총무부장을 투표하였더니 평양에 있는 ‘숭인상업’ 선배였던 한 모씨가 선출되었고 총무과장은 내가 되고 각 부서 책임자도 함께 임명되었다.
1주일 동안은 서류정리와 각 역장 임명, 각 부서장 임명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1주일이 지난 후, 철도국장 곽주렴씨가 상부에 불려가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타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또 1주일이 지나갔다. 총무부장 한씨도 상부의 지시로 불려가더니 곽주렴씨와 같이 함흥차사가 되고 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총무부장과 철도국장의 결재는 두 분의 부재로 계속 서류만 쌓여갔다.
나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철도국에서 되어진 일들을 자초지종 소상히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장고(長考) 끝에 이번에는 네 차례가 될 터이니 어디로 빨리 도망을 가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정작 도망을 가려고 하니 도망갈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나중에 평양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숙식도 할 수 있는 ‘양덕온천’ 호텔로 가기로 하였다. ‘양덕온천’ 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종업원들은 우리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철도국 ‘뺏지(표지마크)’는 네가지로 구분된다. 백색은 사무국 계통, 적색은 운송, 청색은 기관구, 녹색은 보선구였다. 백색을 단 평양 철도국사무처 사람이 나타났으니 이만저만한 대우가 아니었다. 호텔방은 특실이요 식사도 특별식으로 나왔다.
양덕호텔에 온 지 일주일 쯤 되었을 때, 평양의 아버지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양덕호텔에 있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는 연락이었다. 평양에 있는 우리 집에 그 동안 두 번이나 모기관에서 나를 찾으려 왔다갔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양덕온천을 뒤로 두고 이남(以南)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평양역’ 한정거장 못미쳐 ‘대동강역’에 내려서 남쪽을 향하여 ‘신막역’까지 기차로 갔다.
1946년 봄, 신막역에서 평양의 ‘장대현교회’ 교우(敎友)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교회성가대를 같이하던 유재선도 만났다. 이남으로 가는 소달구지를 세로 빌려 타고 노래하며 ‘토성’까지 갔다. 그 곳에는 경비병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도 38선이 어디서 어디까지 경계선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남쪽으로 간다고 적당히 말을 둘러대면 통과할 수 있었다.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먹고자는 숙식문제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전학교에 다닐 때, 신촌에서 하숙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박경호씨 집을 찾아가서 며칠 묵기로 부탁을 드렸더니 그의 부인께서 쾌히 승락하였다.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 교인이기도 하였다.
나는 낮에 ‘조선신학교’에 나가서 공부하였고 밤에는 ‘조양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서울 동자동 서울역 앞에 있었고, 그 때 해군본부는 서울 본동에 있어서 조선신학교에서 해군본부까지 가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해군본부에는 나의 선배되는 장리진씨와 이순상씨와 조찬선등이 있었고 동문으로는 이우룡과 김세원 동문이 있어서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하루는 전차를 타고가는데 차 안 광고판에 ‘해군모집’이라는 포스터가 나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 몇일 몇시에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대학 부속중학교로 모이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그래서 선배님들이 많이 있는 해군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으로 부속중학교에 모이라는 시간에 찾아가게 되었다. 그 곳에 갔을때는 이미 1,0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옆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전부 해군을 지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그 중에서 30명을 선발한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는 이순상 선배님도 나와 있었다.
나는 이 선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험을 보지않고 그냥 집으로 가야겠다고 하였다. 해군은 지금 내가 받고있는 봉급보다 적을 뿐 아니라 신학공부도 못하게 되니 차라리 포기하고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이 선배는 해군을 의복도 주고 쌀도 잘 준다면서 이왕에 왔으니 시험이나 쳐보고 가라는 말을 하였다.
각자 받은 번호를 따라서 교실로 들어갔다. 시험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그 날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합격자 발표명단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이 선배는 잘 되었다고 격려해주었고 해군에 입대하면 해군의 장점과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으니 꼭 들어오라고 하였다.
해군본부에서 3개월, 진해에서 3개월 훈련을 받았다.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 여수에 있는 훈련정대였다. 여수에 가 보니 대원이 50명 가량있고 장교로는 사령관과 경리관 2명 뿐이었다. 짚차도 경찰서장 차와 해군사령관 차와 내 차까지 합해서 도합 3대 뿐이었다. 여수에서 6개월 근무하였는데 동해안 묵호 경비부로 발령이 났다.
여수에서 묵호까지 갈려면 부산으로 갔다가 부산에서 포항으로, 포항에서 다시 묵호까지 3번 배를 갈아타야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사병을 시켜서 여수부두에 묵호까지 가는 배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가는 배는 있는데 기관고장으로 10일 후에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사령관의 허락을 받고 10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10일 후에 사병을 시켜서 또 알아보았더니 10일 후에 출항한다고 하기를 2번이나 계속 기다려야 했다.
그 후에도 또 10일을 기다리다 해군규정에 발령 후, 30일 내에 부임지를 가야만 하므로 부득이 일반 선편을 이용하기로 떠나게 되었다. 여수를 떠나 묵호까지 10여일이 지나서야 도착하게 되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여수에서 기관고장으로 떠나지 못한 배가 수리를 마치고 여수에서 묵호로 가던 도중, 그 배의 일등항해사가 묵호 가까이 가서 권총으로 선장을 쏘아죽이고 기관장도 쏘아죽인뒤 이북으로 월북했다는 것이었다. 예정대로 여수에서 수리가 끝나서, 나와 우리 가족이 그 배에 승선하였다면- 나는 해군장교이고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으니 말없이 그 공산당원은 나를 먼저 쏘아죽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셨다>
묵호에 도착한 지 1개월 만에, 교회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관사 앞마당에 커다란 포탄이 떨어졌다. 옆집에 사는 장교에게 물어보았더니 가끔 연습포탄이 떨어진다고 알려줬다. 한 두시간 후 비상소집이 일어났다. 완전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나갔더니 정보과장이 동해안에 인민군이 10,000 명이 남하하고 있다고 했다. 아군은 우리 해군 50명, 경찰이 40여명, 육군과 공군파견대 대원 기타 모두를 합하여 150여명 정도라고 했다. 우리는 기관총 3대를 진지에 배치될 정도로 미약하였다. 묵호 뒷산을 산세가 험악하게 생겨 우리가 수풀속에 숨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150대 10,000명은 상대가 되지않았다. 인민군을 새까맣게 내려와서 묵호 뒤 벌판을 메웠다. 인민군들은 전부 무기와 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묵호를 향해 점점 가까이 내려와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드디어 인민군을 우리가 숨어있는 산에까지 접근해 올라왔다. 그러나 그 때까지 아군의 발포명령은 없었다. 우리와 적군이 거의 마주칠 무렵 발포명령이
내려졌다. 기관총은 일제해 불을 뿜으며 발사되었다.
이렇게 전투는 3일을 계속하였다. 아마, 인민군이 1,000여명은 사살되었으리라 여겨졌다. 아군들도 유탄에 맞아 20여명 사상자가 나왔다. 실탄이 떨어졌다.
서울에 있는 해군본부와 연락이 끊겼고 다른곳도 연락이 두절되어 실탄을 보급받을 곳도 없었다.
날이 밝았다. 아군 130 여명이 총과 무기를 갖춘 인민군 9,000명을 당할 수 없었다. 만일 적군이 또 우리 앞에 진격해온다 해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각오는 돼있었다. 그러나 다행이 3일 동안 총격전이 있은 후, 인민군은 더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 편에서 나를 도우셨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가족들을 거느리고 가까스로 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후퇴하였다. 경북 강구까지 후퇴했다. 작은 항구였다. 거기서 10리 쯤 내륙으로 들어가서 군청소재지 ‘영덕읍’이 있었다. 인민군은 영덕읍까지 내려왔다. 우리는 영덕읍을 중심으로 인민군이 더 내려오지 못하도록 영덕읍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캄캄하여졌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났다. 깊은 밤, 갑자기 인민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강구까지 후퇴하였다. 날이 밝자, 바다 위에 떠있는 미군함대에서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많은 인민군이 사살되고 부상자들의 속출하였다. 우리도 이 때라 하고 총격전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해군이 아니라 해병대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전투하기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반복할 때 쯤, 김석원 부대 장병들이 도착하였다. 영덕시내는 온통 전사자들의 시체가 널려있어 밟지 않고는 전진하기 어려웠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게 전투하기를 일곱? 번 반복하였다. 영덕시내는 불바다가 되었고 영덕군청의 굴뚝만 높이 남았다. 우리 부대의 장병들도 적잖은 희생이 따랐다. 영덕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셨다>
할렐루야!!
친애하는 교우님 아드님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저는 신문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아들 형제와 딸 다섯을 양육하였으며 부모님과 홀로 된 누님과 우리 두 사람이 있어 우리 식구는 모두 열 두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식사를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잘 하여 드리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용돈은 한번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드님들은 효도심이 있어서 어려운 중에도 부모님을 잘 모시고 계신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운 것은 한국에서 부모님들이 많이 자살을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도 하지 못할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합니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잘 돌보아 드리세요. 부탁합니다.
♣이 편지를 쓴 백석 김흥(Pastor, Peter H. Kim) 씨의 주소는 3555 Judro Way #206 San Jose, CA 9511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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