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1. 존재의 허무-그 나락에 대하여
프로이드가 밤에 꾸는 꿈에 집착했던 것처럼,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의 백일몽에 지고한 관심을 보였으며, 세익스피어는 <한 여름밤의 꿈>을 통해 인간의 백일몽 즉, 욕망의 헛됨에 대해 풍자했다.
무의식의 저장고 속에 감추어진 다양한 욕망의 항목들이 낮과 밤에 꾸는 꿈의 내용이 되고,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이룰 수 없는 꿈과 욕망들을 쫓아 한평생 백일몽 속을 헤메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매순간 가장 어두운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욕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균열되기 시작한다. 일상이란 언제나, 우물처럼 고요하고, 대지처럼 안전하며, 구름처럼 고요히 흐르는 것이기에, 현실의 법칙에 의해 금지되고 박탈된 욕망일수록 인간은 더욱 강하게 매혹당한다. 그리하여, 일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한 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일탈이 일상화한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큰 불이 많은 재를 남기고, 큰 물이 더욱 큰 골을 새긴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던가? 욕망이 클수록 일탈 또한 극적일 것이므로, 일탈이 일상화 된 뒤에 느끼는 존재의 허무 또한 더욱 클 터. 현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환상적이고,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인 존재의 황량한 풍경 속에 선 인간의 분열된 정체성의 나락, 닳아빠진 속옷처럼 나달거리는 삶의 감각이란, 어쩌면 잘려진 더듬이처럼 쓸모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6년 이상문학상 수장작인,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현실 같은 환상과 거짓말 같은 현실 사이에서 우울하게 흔들리는 한 백일몽 환자의 이야기이다.
2. ‘러브피아’를 찾아서
땀구멍을 아리게 하는 차가운 공기와 폐부로 스며드는 안개, 전혜린의 수필집을 통해 너무나 익숙한 북독일과 신들의 도시 오슬로를 넘나들며 소설 <밤이여, 나뉘어라>는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무척 시적인 동시에, 무척 아득한 그림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물안개 일렁이는 새벽의 항구에 서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쩐지 영화 <베니스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소설 <밤이여, 나뉘어라>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나’와 ‘나’의 대타자였던 ‘P’의 이야기다.
고 3때 같은 반 친구였던 P는 걸어다니는 신화이자, 만인의 우상이었다. 언제나 1등을 하던 P의 그늘에 가려 만년 2등 신세를 면할 수 없었던 나로 말하자면, 박탈감과 질투 그리고, P에 대한 깊은 매혹에 동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면서 P는 미국으로 떠났으며, 나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내가 의학에서 영화로 업종을 바꾼 이유는 간단하다. P를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 “P의 뒤에서 언제나 숨이 찼”으나,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이었으며 “보이긴 하지만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무지개”였던 P를 밑바닥에서부터 이겨내기 위한 욕망에서 “길 없는 들판”이나 다름 없는 영화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던 길에, 영화감독으로 꽤 성공한 나는 이미 신화가 된 P를 오슬로에서 재회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얼마나 가볍고 덧없는 것인가를 나의 옛사랑이었으나, P의 아내가 된 M을 통해 P의 근황을 듣게 되면서 깨닫는다.
너무 어린 나이에 모든 욕망의 항목들을 죄다 섭렵해버린 P에게 남겨진 삶의 황폐함은 현실과 비현실, 욕망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P로 하여금 삶과 꿈을 넘나드는 백일몽 환자로 살아가게 했던 것. 그리고, 삶과 꿈 사이의 검은 심연 속에 잠복한 참을 수 없는 공허와 사무치는 허무를 견디기에 P는 너무 먼 곳까지 튕겨져 나오고 말았던 것.
모든 욕망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이루기 힘들기 때문에 욕망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좌절을 모른 채 너무 쉽게 욕망을 이루어온 수재 P, 이제 갖 30대가 된 젊은 P는, 욕망이라는 금단의 과일 또한 결국에는 한 줌의 상상력과 과장된 의지에 불과한 것이라는 진리 또한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쉽게 알아버린 겉늙은 젊은 영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P는 외과의로서의 보장된 미래를 내동댕이치고, 꿈을 잃고 노쇠한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꿈과 욕망을 되돌려주는 알약 ‘러브피아’ 창조에 매달리게 된다.
결국, P는 가장 허무맹랑하고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꿈을 창조하고, 그 꿈 속에서 만 살아갈 수 있는 불구의 인간이 된 것이다.
3. 쉼없이 꿈꾸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안데르센의 어릴 적 꿈이, 황금의 성에서 중국의 황제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꿈은 이루어지지 말아야 하는 거야”라는 P의 모노로그를 통해, 우리는 안데르센의 행복과 고통을 엿본다.
꿈을 잃은 인간, 욕망이 사라진 인간 또한 인간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나 스스로를 향하여 묻는다.
오색찬란한 꿈과 욕망의 꽁무니를 쫓으며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삶을 일러, 세상은 ‘희노애락 오욕칠정’이라 간단히, 그러나 결곡하게 요약했다. 우리는 ‘희노애락 오욕칠정’의 바다 속에서 서로의 팔뚝을 물어뜯고, 얼굴을 할퀴며 욕망을, 그리고 꿈을 향해 내달리고, 감히 그것을 일러 삶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혈이 낭자한 삶의 풍경을 통해 삶의 감각을 시시때때로 회복한다. ‘어떻게’라고 묻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그런 아이큐를 지닌 평범한 인간으로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면서, 성취한 욕망의 수보다도 좌절당한 꿈의 편린들을 가슴 속에 더 많이 안고 있는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패와 좌절의 아픈 감각들은 마치 고향처럼, 거대한 삼나무 뿌리처럼, 우리를 지상과 현실에 붙들어 메어주기 때문이다. 좌절과 실패의 고통은 우리를 현실 속에 붙들어 메어주는 인력이자 척력이다.
내게는 12월이 되면 언제나 꾸는 꿈이 하나 있다. 꿈 속의 나는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운 교실에 않아 학력고사 문제를 풀고 있다. 손바닥만한 창밖엔 세상을 덮어버릴 기세로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나는 언제까지나 하나의 수학 문제만을 풀고, 또 푼다.
혹자는 나의 꿈을 일러 실패한 입시생 증후군이라 진단했고, 혹자는 개꿈이라고 감히 웃어 넘겼다.
그래도, 누가 알리, 그 꿈의 후속편이 있어 나를 실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미역국에 밥말아 먹듯, 학력고사를 훌훌 말아먹은 친구들끼리 붉은 홍옥을 으적 으적 베어 먹으며 눈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의 눈물을. 그리고 가슴까지 시려오던 과즙에 얼얼하게 얼어붙는 입술로 키득키득 멈추지도 않고 웃어 대던 실소를.
그것은 아마, 우리에겐 내일이, 앞으로 더 꾸어야할 꿈이, 이루어야할 욕망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도 새빨간 홍옥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수시로 해답이 바뀌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던 그 얄미운 수학 문제는 어쩌면 내 인생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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