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유니버스와 하리수의 결혼식
1.다른 모습,같은 욕망
각국의 미녀들이 모여 미의 경합을 벌이는 ‘2007년 미스 유니버스’본선 대회가 5월 28일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다. 그리고, 지난 19일 트랜스 젠더(trans gender) 하리수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세계 남성들의 판타지로서의 여성성을 구현하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와 남성들의 악몽이자 하이퍼 리얼리티로서의 여성성을 재현한 트랜스 젠더 하리수의 결혼은 각기 다른 겉모습의 같은 내용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무척 흥미롭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성적인 욕망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성정체성과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적인 감정과 관계들을 포괄하는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확장했을 때 여성의 육체와 여성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을 재현하는 소통 방식과 재현 방식은 문제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것이 대중문화 (매체)와 결합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주지하다시피, 대중문화(매체)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변형시키고 굴절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인 동시에 가장 진보적이고 문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장치로써, 미스코리아와 안티 미스코리아가 동시에 개최되고, 동성애 반대자들의 렐리와 게이 메리지(gay marriage)가 공존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대중문화 산업과 결합될 때,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는 이 시대의 가장 큰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문화 콘텐츠이며, 가장 치열한 정치적 공간이 된다.
2. 세계 평화, 혹은 “World Peace”
여자의 몸이 페티시화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의 가치로 그 우열이 결정되며, 일단 상품이 된 후에는 페티시화한다. 최대 이윤의 창조라는 자본주의 철학의 기본 명제에 의해 고부가 상품화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또한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페티시화 한다.여성의 몸은 인간의 육체이기 이전에 하나의 상품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남성은 여성의 육체를 통해 판타지를 생산하고, 여성 또한 여성의 육체를 통해 남성과 세계의 욕망이 되고자 자신의 육체를 길들이고 재건축하기 위한 정보를 축적한다. 미인대회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가장 상업적으로 재현한 대중문화 상품이다.
56년 동안이나 롱런해왔으며, 부동산 재벌이자 수완가인 도날드 트럼프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2007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는 50여개국 76명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뽑는 일종의 경연대회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미인대회라면, 자칭 미인을 자처하는 76명의 여인들 중 최고의 미인을 뽑아야 할 터이니, 당연히 ‘미’의 기준이 있을 터. 그러면, 이 미의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기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미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미스 유니버스는 18세 이상 27세 미만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스타일 테스트(이브닝 가운 심사)와 피트니스 테스트(수영복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과 관객들의 눈을 충분히 즐겁게 해줄 수 있을 만큼의 여성미와 섹시미와 지성미를 발산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터뷰 테스트를 위해 “세계평화(World Peace)”라는 단어와 무척 친해져야(영화 <미스 에이전트>를 생각해 보라) 한다.
갖 20대가 된 여자에게 여성미와 섹시미와 지성미를 바란다는 사실은 애초, 잘 포장된 거짓말들, 눈이 만들어내는 가시들의 집합으로 싸여진 하나의 인형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화장과 24개의 치아가 모두 드러나는 시원한 미소에도, 미스 유니버스 대회 속 여성들의 육체 그 어디에도 ‘인간’과 ‘정신’과 ‘마음’이 차지할 공간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중문화를 키워 온 것이 팔할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그 여성다움이 육체만을 담보로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나, 오랜 세월 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 구체적 불이익을 감당하고 남성중심적 제도와 관습에 복종했을 때 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여성성, 우리가 명명하는 미의 기준이란 아무리 뜯어보아도 무척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3. 소피가 발견한 것
하리수를 보라.
그/그녀는 트랜스 젠더 연예인으로서 이항대립적 성차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당당한 트랜스 섹슈얼리티를 논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하리수의 트랜스 섹슈얼리티가 우리의 완고한 남근중심주의적 권력체계를 균열시키지도 않았으며, 그/그녀의 성적 교란이 남근 중심주의와 남성에 의해 구축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에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품으로써 TV 속 이미지로서만 유효한 시뮬라르크일 뿐이다.
그/그녀의 이미지는 오히려, 남성이 소망하는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더욱 첨예하게 재현해냄으로써 기존의 젠더 정치학을 더욱 상업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리수는 여성보다 더욱 여성적인 섹슈얼리티로서 가장 첨단의 남근주의적 문화 상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여자건 남자건, 심지어 트랜스 젠더조차도 육체와 섹슈얼리티의 정치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갑자기 90살이 되어 버린 소녀 소피가 등장한다. 황야의 마녀의 마법에 걸려 노파가 되기 전의 소피는 장미꽃처럼 아름답지는 못 했을지라도 적어도, 해바라기처럼 젊고 싱싱했다. 90살이 된 소피는 그럼에도 여전히 마법사 하울을 사랑하고 하울 또한 여전히 소피를 돌본다. 소피가, 불과 몇 초만에 자신의 육체를 관통하고 사라진 70여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바라본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황야의 마녀로 인해 졸지에 늙어 버린 소피는 바로, 노쇠와 죽음이 먼 곳으로부터 갑자기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보았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존재론적 각성에 도달한 것일터. 영원할 것이라 믿는 젊음과 미와 건강한 육체가 인간의 탄생과 함께 소진되어 간다는 사실, 아름다움 또한 한 시대가 매겨놓은 상품가치의 총화일 뿐,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황야의 마녀가 소피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70여 살의 무게감 속에 숨은 진실일 것이다.
관객들의 환호와 번쩍이는 스포트 라이트 아래서, 수만 불짜리 드레스와 보석으로 날아갈 듯 치장한 팔등신 미녀들이 말하는 “세계평화, World Peace” 가 공허한 이유는 바로, 극도로 페티시화한 그녀들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남근중심주의에 근거한 상업적 대중문화를 통해 제조된 ‘육체’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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