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여년 꽃피운 세련된 문화와 기개
건축 기술·막강 철기군 등 융성한 국력 증명
온돌·기와지붕은 현대 우리생활로 이어져
저고리·머리모양 등 드라마 ‘주몽’묘사 실재
지난해에 한국 드라마 ‘주몽’을 보면서 내내 비웃었던 것이 있다. 주인공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이 너무 화려하고 섬세하여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때가 기원 전 1세기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인데 대소, 영포, 주몽 왕자가 입고 나오는 옷을 보면 옷감이 최고급 비단에다 색상이며 디자인, 금박은박 무늬와 수공예, 바느질 등이 너무 세련돼서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느껴졌다. 심지어 그들이 옷 색깔에 맞추어 머리에 두르는 띠는 스판덱스가 들어간 천으로 만들었는지 이마에 보기 좋게 착 달라붙는 것이 영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 LA 한국문화원(원장 김종율)에서 열리고 있는 고구려 특별전을 보고 나서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주몽’의 의상묘사가 어쩌면 순전히 상상과 과장의 산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처럼 고구려인들은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적 삶을 영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BC 37년 주몽이 건국하여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700여년 꽃피었던 그들의 세계는 과연 어떠했을까? 12일 문화원에서 열린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 세미나(강사 울산대 전호태 교수)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았다.
고구려의 역사는 한국의 실질적 출발점이며 고구려의 문화는 현재의 한국문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불행하게도 그 유적이 모두 북한과 중국에 남아있어 우리가 마음대로 가볼 수 없지만 여러 문헌과 고분 벽화를 토대로 분석해 보면 고구려는 강대하고 융성하고 화려한 나라였다.
당시 주변 국가들은 고구려의 기술과 문화를 배우려고 애썼고, 많은 기술이 타국으로 전래됐다. 특히 온돌과 부엌 문화, 기와지붕 형태는 2,000년의 세월을 지나며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효율적 난방 시스템이었던 온돌은 동북아 여러 나라로도 전파되었고, 기와 만드는 뛰어난 기술은 신라를 통해 일본까지 전해졌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쓰이는 기와의 원형은 고구려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는 유명한 그림(무용총 수렵도)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활은 소의 뿔을 5개 이어서 만든 것으로 짧아도 탄력이 높아 800m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중국은 고구려의 활 만드는 기술을 알려 애썼으나 끝내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돌로 산성을 쌓는 기술과 무기 및 무장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말까지 철갑옷과 투구를 씌웠을 정도로 고구려 철기군은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광개토왕비를 비롯해 장군총, 산성자고분군의 돌무지무덤들, 1,500년이 지났어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산성 유적들은 단단한 돌 건축물을 짓는데 능했던 고구려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소매춤을 추는 사람들(무용총 모사도)>
<무용총 수렵도의 일부>
<고리튼 머리(안약3호분). 올린 머리(삼실총). 내린 머리(무용총)>
다양한 가무와 기예 고분벽화 속에 생생히
곡물저장·가축사육·저장발효음식도
유적 대부분 북한·중국에… 훼손 안타까워
무덤은 집안 일대에서만 1만3,000여기가 확인됐을 정도로 많은 수가 남아있으나 상당수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라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LA에서 만나는 고구려의 기상’이란 제목을 붙인 문화원 전시회는 한번 꼭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고분들의 모형을 비롯해 영상물 설치 등 전시장을 공들여 꾸민데다 벽화 하나하나의 내용이 흥미롭고 경이롭다. 오는 24일까지 주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픈한다.
한국문화원 주소와 전화번호는 5505 Wilshire Bl. LA, (323)936-7141 #112
▲식생활
고구려인의 주식은 조와 콩, 밀, 보리, 수수, 기장 등 곡물류였다. 곡물은 가루를 내어 시루에 쪄 먹었고, 육식으로는 소, 돼지, 닭, 개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멧돼지, 노루, 꿩 등을 사냥하였다. 콩을 주원료로 만든 저장 발효음식과 양념이 버무려진 불고기와 비슷한 맥적은 주변에도 알려진 식문화였다.
당시의 문화 중 지금과 다른 것은 귀족 가문에서는 사람들이 한 상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각자 상을 받아 따로 먹었다는 것이다. 한쪽에 뷔페 스타일로 음식이 차려져 있고 하인이 덜어서 서브하기도 했으며 모두 1인분씩 차린 자기상을 받아 식사하는 모습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물론 일반 평민들은 가족이 한 상에서 식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귀족 저택의 부엌은 안채와 분리돼 있었다. 하녀는 조리가 끝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로 가 상차림을 했다. 각저총 벽화에는 5세기 귀족의 호화로운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주인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는데 커튼처럼 화려한 장막이 쳐진 넓은 방 중앙에서 밥상을 받는 여주인과 그 옆에 꿇어앉은 두 여성이 보인다. 피장자가 생전에 누린 호사스러운 생활을 재현한 그림으로 여성의 단정한 기품과 정결한 상차림을 보여주고 있다.
▲패션
고구려인들의 저고리와 바지, 모자, 신발에 보이는 패션 감각과 실용성은 오늘날에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됐다.
남자의 옷은 유목민의 옷차림과 통하는 저고리와 바지였으며 여기에 겉옷과 띠, 머리장식과 머리쓰개, 신발 등이 더해졌다. 여자는 여기에 치마가 더해진 것이 기본 옷차림으로 한복의 전통적인 주름치마는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옷의 재질과 색깔, 통의 넓이, 선의 장식성과 무늬 등은 신분과 계급,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귀족의 옷은 여러 색 바탕에 화려한 무늬가 장식된 통이 넓고 긴 비단 옷이었고, 평민의 옷은 무늬가 없고 색깔이 단조로우며 통이 좁아 활동하기 편한 것이 많았다.
여자의 겉옷으로 두루마기가 있었는데 소매끝과 깃, 아랫단에 선을 대었다. 이것은 끝이 해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옷 자체에도 윤곽을 주어 예쁘게 마무리한 것이다.
여자들의 헤어스타일을 보면 머리를 올려서 비녀를 꽂거나 복잡한 장식으로 고정시키기도 하고 뒤로 묶어 검은 모자로 덮기도 했다. 시집간 부녀자는 올린 머리를, 처녀와 아이들은 내린 머리를 했으며 올린 머리는 다시 여염집 부녀들이 얹은머리를, 귀족 및 왕실 부녀들은 고리 튼 머리를 했다.
그러니까 드라마 ‘주몽’의 후반부에 주몽의 아내 ‘예소야’가 평민으로 숨어 살 때 입었던 옷과 머리 스타일은 고구려 당시의 평민 여성의 패션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남자는 성인이 되면 상투를 틀었으나 상투를 보여주지 않고 그 위에 모자나 수건을 쓰는 것이 예의였다. 모자는 신분을 말해주는데 장식에 따라 신분 높을수록 장식이나 깃털의 수가 많았다. 평민들은 머리수건을 애용하였다. 드라마에서 오이, 마리, 협보 등 일부 남자들이 머리를 묶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멋있게 하느라고 연출한 것이지 실제와는 다른 모습이다.
신발은 부츠 형태의 가죽신이나 나막신과 풀로 만든 짚신도 있었고 전투용으로 신 바닥에 날카로운 못이 거꾸로 박혀있는 신발도 있었다.
▲놀이
고구려인이 가무와 기예를 즐겼음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와 춤, 운동과 놀이가 현대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고분 벽화들은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의 전문 기예단은 귀족 및 왕이 베푼 연회에서 말 타기, 손 놀리기, 발 놀리기, 칼 부리기, 짐승 부리기 등의 공연을 펼쳤다. 훈련시킨 원숭이의 재주를 보여주는 벽화도 있다.
춤 역시 전통 한국무용의 모습이 고구려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악기가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일렬로 선 여자 무용수들이 긴 소매를 나풀거리며 소매춤을 추는 그림을 볼 수 있고 칼춤과 북춤도 추었는데 오늘날 북춤의 가장 오랜 기원으로 보인다.
악기는 벽화와 문헌상 36종이 확인됐다. 거문고와 뿔 나팔, 젓대와 소, 북 등이 그것이다. 무용수와 연주자들은 화장을 했는데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했으며 이마와 볼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이 외에 저글링 하는 모습, 긴 장대 위를 걷는 곡예, 씨름 장면, 태권도의 원형에 해당되는 격투기 모습도 보인다. 이런 것들 모두가 현대 한국문화로 이어져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귀족들은 소가 끄는 우차를 자동차처럼 타고 다녔다. 여자와 승려가 타는 수레는 좌석 둘레와 위를 차양으로 가린 것이고 차양이 없는 것은 남자 전용이었다. 또 귀부인의 경우 늘 양산을 받쳐주는 사람을 데리고 다녔던 것으로 보아 햇빛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또한 벽화들에는 부엌, 우물, 방앗간, 외양간, 수레 넣는 차고, 고기 창고, 곡물 창고 등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윤택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안악 3호분에 나타난 부엌의 모습. 아궁이에서 떡시루를 찌고 있다>
<음식상 나르기(무용총 모사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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