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이들에게 한글로 편지를 쓰게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
미국으로 이민 온 이민 1세들은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강박관념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나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서 침이 꿀꺽 넘어갈 지경이다. 영어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한글로 글을 쓰겠다고 주말이면 골방지기가 되어버린 지도 햇수로 수년이 흘렀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돈벌이하고 전혀 관련 없는 것들만 찾아다닌다던 남편의 면박도 그 모서리가 둥그렇게 변했다. 오히려 애처로운 눈빛이다. 남편은 미국에 살면서 문학을 하겠다는 나의 열정은 잘못 끼워진 단추 구멍이고, 깨진 난로에서 훨훨 타고 있는 장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로 빈정거리던 남편이 지금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말을 건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기를 해버린 것인지.
아무튼 난 그동안 꼬깃꼬깃 모았던 비자금을 탈탈 털어 조그마한 공간을 하나 얻었고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았다. 열댓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있는 공간에서 나는 신나게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의 얼굴을 상상한다. 영어가 더 익숙한 아이들에게 쌍, 캭, 뻑 따위의 된소리를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계산을 들이대며 따져드는 남편의 서슬 앞에서 폼 나는 나의 생각은 저절로 무릎이 굽혀진다. 남편의 말대로 다음 달 임대료에 끌탕을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남편의 지적대로 어긋난 단추 구멍이고 깨진 난로 속에서 훨훨 타고 있을 지라도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그곳에 연정을 주고 싶은 것을. 노리끼리한 색깔과 똥색은 동일한 색이라는 한국적 표현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을. 쨍하는 하늘이 깨어질 것 같은 맑음을 문자로 찾아낼 때의 희열감이 어떤 거라는 것을. 한국말을 잘해도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면 문맹자나 다름없다는 끔찍한 사실도 일러바치고 싶은 것이다.
난 어릴 적에 불렀던 ‘원숭이 똥구멍은 빠알개/ 빠알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빠나나/ 빠나나는 길어/ 기이르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아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하던 그 비약을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똥구멍이 빨갛다고 사과와 꿰어 맞추는 무지막지한 일체감에 나의 포부를 은근슬쩍 꿰어 놓는다. 냄새나는 원숭이에게서 결국에는 백두산에 도달하고야마는 그 희망을 아이들에게도 전달하고 싶다. 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글을 배워야 한다는 협박보다는 한글의 맛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아이들이 내 앞으로 달려와 그 맛을 느끼기 전에 어른들은 이미 순수하지 못하다. 어른들은 성적과 관계없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내 남편이 그랬듯이, 원숭이 똥구멍에서 백두산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머릿속에 한글은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보다 못한 존재로 밟고 서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들도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한글 맞춤법 앞에서 도도하게 아는 척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난 순수하지 못한 어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노래방에 가면 저절로 한글을 배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무식 때문에 백두산엔 절대로 다다르지 못할 거라는 경고장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한글은 저절로 배워지거나 아예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쯤으로 아는 어른들의 인식이 더 큰 문제라고 불 꺼진 동네를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떠들어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보같이 어른들을 상대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싶진 않다. 그보다는 조금 행복한 생각을 해보자. 난 아이들에게 한글로 편지를 쓰게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현금으로 환산이 되지 않으면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어른들도 감사하다는 문자 앞에서는 눈물부터 흐른다는 비밀을 알려 줄 것이다.
<권소희>
약력: 소설가. 일러스트레이터. 월간문학상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저서 ‘시타커스, 새장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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