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집안과 사업상 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 얼떨결에 따라간 곳이 ‘실로암 연못의 집’이란 장애인과 치매노인들이 있는 복지시설이었다. 경기도를 벗어나 홍천군 국도에서 좁은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그곳은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이제 막 봄의 시작을 알리는 새소리와 시내물이 흘러서 돌아내려가는 아주 평온한 곳이었다.
갑자기 이곳에 며칠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어렵게 허락을 받아 나는 기거할 방으로 안내되었다. 마침 점심때라 식판에 담긴 식사를 갖다 주고 양손이 부자연스런 이들에 밥을 먹이고 물을 못 마시는 이에게 물도 먹여주고 뒷정리와 설거지를 도운 후 건물 밖으로 나가니 많은 원생들이 왔다갔다 운동 삼아 놀고 있었다.
그 중에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50대 중반의 ‘호근’이란 친구가 자기와 놀자며 휠체어를 가지고 와서 나를 이리저리 밀고 다니게 하며 어린아이보다 더 순진한 표정으로 신바람을 냈다. 저녁식사 후 예배를 마치고 방으로 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원래 믿음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그동안 장애인들과는 악수도 안 해보고 애써 외면만 했는데 그 날 일이 떠올랐다. 그들을 번쩍 들어 안고 포옹하고 장난치며 놀았던 기억과 무릎 꿇고 무언가 기도하던 나의 모습이 스스로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3일 밤 4일 낮을 지내면서 나는 이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됐다. 그러면서 내가 손발이 되어 이들을 도와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에게 절실히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이들을 돕는 게 아니라 내가 이들에게서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얼굴로 포옹하고 주머니에 며칠이나 가지고 있었는지 때가 낀 껌을 부자유스럽게 까서 반을 나의 입에 넣어주곤 기뻐서 좋아하는 모습에 가슴이 메어지는 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들의 행동에서 자기들을 정상인과 같은 인격체로 대우해 주길 바란다는 무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3일째 되던 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나를 찾아 만나서 밝은 미소를 띠며 “정 선생님, 우리 식구들이 정 선생님과 잘 지내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은 지난날에 방산시장과 가락시장에서 다리에 고무튜브를 차고 앉은뱅이 리어카를 밀며 잡동사니를 팔면서 은혜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의 거지였다’는 책의 저자인 한승주 목사님이었다.
다음날 새벽기도에 절뚝거리며 오는 이, 낑낑 기어서 오는 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오는 치매노인 등등 순식간에 60여명으로 채워진 예배당에서 나는 조용히 앉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들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 자신, 속이 병들고 마음이 불구인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들의 행동과 눈에서 ‘희망’을 보았고 천한 자 같으나 귀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많은 이에게 교훈을 주며, 무식한 자 같지만 지혜로운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기도 내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누구보다도 절실한 기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서울 도착 후 몇 번 목사님의 연락이 있었다. ‘실로암 연못의 집’ 후원회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감히 그럴 능력도, 인물도 되지 못한다고 사양을 했지만 “후원회장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목사님 권유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겠다”며 수락하고 말았다. 하찮은 나를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불씨가 되어주고 나를 통해 저쪽으로 가고 싶으면 기꺼이 다리가 되어 주리라고 다짐했다.
벌써 그리워진다. 호근이형, 정옥씨, 중증뇌성마비 미소천사 현정이. 미국을 동경하지만 오지 못하는 이들을 당장이라도 업고 달려오고 싶다. 한국에서의 체험을 주위에 알리자 마음을 모으겠다고 밝혀 주신 몇몇 분들이 있다. 아직 아무런 구체적 계획도 없지만 이런 분들의 마음이 큰 힘과 용기가 되어 준다. 따뜻한 마음이 있고 뜻이 있으신 분들의 조언과 충고, 그리고 작은 참여를 기다린다. 714-788-4341
브라이언 정
실로암 연못의 집 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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