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리에 잠을 깼다. 창 왼쪽 모서리가 희부염하다. 동쪽 끝에서 뜬 해가 나의 남쪽 창에 들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이다. 지금은 새벽 여섯시. 나의 창은 회색빛 여명을 배경으로 한 폭의 담채화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한겹 얇은 어둠을 걷어내고 아침 햇살이 창에 어리면 그때는 채색화나 색감 좋은 유화로 바뀌게 된다. 이 때쯤이면, 시침은 대개 일곱 시를 가리킨다. 이 해뜰 무렵의 한 시간이, 하루를 여는 내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회색빛 여명을 응시하며 창에 눈을 주고 있으면 나는 어느 새 시인이 되고 철학가가 된다. 동양화가 묵의 농담에 따라 표정이 다르듯, 나의 창이 그려내는 풍경화도 빛의 채도에 따라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르다. 그림이 다르니 제목 또한 다르고 건네오는 말도 달라진다. 때로는 ‘침묵 속의 공감’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런 나의 창을 나는 ‘말하는 풍경화’라 이름 짓고 날마다 나만의 은밀한 새벽 전람회를 즐기고 있다. 마음을 열면 누군들 사랑해 오지 않으리. 사랑은 ‘주님의 숨결’과 같아서 무생물에도 불어 넣어 주기만 하면 생명체가 되어 말을 걸어온다. 나는 이것을 창을 통해 배웠다. 집과 무덤의 차이는 창문의 유무에 있다던가. 창이 있음으로써 나의 방은 무덤이 되지 않고 따뜻한 집의 일부가 되어준다. 오늘은 토요일, 더욱 느긋한 마음으로 ‘말하는 풍경화’ 앞에 나를 앉힌다.
아침 햇빛이 부채살을 펴며 조금씩 다가오자, 4 바이 6피트의 커담한 화폭에 각각의 소품이 형태와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람에 너울거리는 버드나무와 잡목 한 그루, 반쯤 몸을 내밀고 서있는 팜츄리와 그 위에 시골 학교 종처럼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구리 풍경. 그리고 풍경화의 단골손님인 구름 몇 점과 이 모든 소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푸른 창공. 소재라야 단순하다. 마치, ‘생로병사’라는 사자성어 한 마디면 족한 우리네 인생처럼.
사실, 인생이란 단어야 길게 풀어 써 봤자 ‘태어났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었다’라는 짧은 단문밖에 더 되는가. 풍경화의 소재도 하나의 낱말처럼 간단명료하다. 그리고 문패처럼 늘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바람이 불고 새벽 새들의 군무가 어우러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형태와 색채에 소리까지 입혀지면서 이야기를 덧해 한 편의 오페라를 연출하게 된다. 때로는 푸치니의 ‘토스카’처럼 비극적 오페라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피가로의 결혼’처럼 희극적 오페라가 되기도 한다. 오페라는 인생의 축소판. ‘생’과 ‘노’라는 단 한 음절 사이에 끼어든 ‘사랑’이나 ‘운명’이란 단어 때문에, 우리는 또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병’과 ‘사’ 사이에 끼어 있는 긴 고통은 차라리 말없음 표로 남겨두자. 하지만, 조약돌 없이 어찌 시냇물의 노래가 있겠는가. 걸림돌로만 생각하던 마음을 고쳐 먹으라고 창은 이른다.
오늘 따라, 제대로 된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던 새들이 더욱 바빠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 쪽에서 다시 왼쪽으로, 사방팔방 무늬를 그리는 새떼들의 군무는 단조로운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꾸며준다.
저들의 전언은 무엇일까. 새벽 새떼들의 몸짓을 보며 그들의 암호를 풀어본다. 저 넓은 창공을 날고도 상처 하나 내지 않는 ‘무흔적’. 순간, 이 세상에 작은 점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 안달하던 내 욕심에 실소했다.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던 그 위선이라니. 저토록 부산하던 새들의 날개짓은 이런 나를 깨우기 위한 작은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래펄에 자꾸만 제 발자국을 새기지만, 파도는 몇 번이고 다시 와서 말없이 쓸어간다. 겨울 눈밭도 마찬 가지다. 눈밭 위에 어지러이 발자국을 남기면, 하얀 눈발 나비보다 더 가벼운 몸짓으로 따라와 발자국을 지워준다. 어찌 보면, 자연은 걸레를 들고 따라다니는 어머니와도 같다.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풍경을 깨워놓고 팜츄리 잎 사이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풍경이 놀라 땡그랑 거리자, 제 구도를 그리며 조용히 서 있던 팜츄리도 후두둑 잎을 턴다. 아, 그때였다. 갈갈이 찢기운 잎새 끝에서 수 천 수 만 조각의 햇살이 금빛 가루를 뿌리며 쏟아져 내렸다. 와아. 저 눈부신 빛의 난무. 찢겨져 더욱 아름다운 ‘성의’를 펄럭이며 팜츄리 잎새도 목청 높여 노래하고 있다. 바람과 햇살과 팜츄리 잎새가 탄주하는 이 아름다운 삼중주. 음악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음악이 덧입혀지는 이런 전람회는 난생 처음이다. 장미 위에 쏟아지는 햇살인들 이 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울까. 부호란 부호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느낌표 하나만 가슴에 남는다.
꽃도 열매도 자랑할 게 없던 팜츄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새마저 앉지 않던 잎새들의 외로움은 또 어떡하고. 갈갈이 찢겨져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잎새의 모습이, 마치 ‘상처받은 마음’의 대변인 같아 눈길을 줄 때마다 애잔했었다. 그래서일까. 햇살 자체도 아름답지만, 팜츄리를 향한 햇살의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왜 ‘상한 갈대는 꺾지 않는다’는 엉뚱한 말씀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서라. 부활의 아침이다. 오늘은 그저 행복하고, 기뻐하고, 무거운 주제에 매달리지 말자. 창이 제 마음을 열어 찬란한 부활의 금빛 연서를 보내오듯, 나도 내 마음을 열어 그에게 초록빛 통신을 보내자.
“장미꽃은 그대로 두어도 향기를 낸다.”
팜츄리 위에서 부서지던 금빛 햇살이, 나의 창에 부제를 달고 있다.
< 지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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