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비탄에 빠졌다. 미국 최대의 캠퍼스 총기사건의 범인이 한인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한인사회는 더욱 비탄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 잘 하고 잘 자라주기를 기원했던’ 우리 한인 1.5세가 이렇게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비극적 사건이 알려지면서 범인이 아시아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나서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범인이 중국계라는 보도가 나왔을 때 다소 안도했다.
그런데 사건 다음 날인 화요일 아침 친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니, 범인이 한인학생이라는 데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베스비우스 화산보다 더 처절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지난 3, 40년간 온갖 고통과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이 척박한 변방의 개척지를 동가식서가숙 하면서 일군 우리의 자그만 결실이 일순에 뉴욕의 세계무역회관처럼 허물어져내리는 것 같은 통한이 가슴을 친다.
우리에게 가장 뼈아픈 저 LA의 4.29사건이 한인사회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었다면, 버지니아 텍 사건은 우리 이민사회에 흐르고 있는 농축된 내부적 갈등의 화산적 분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한인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총기사건의 피해 당사자들과 가족, 친지, 학교, 그리고 전 미국인들에게 심심한 조의와 위로와 진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최근 미주의 한인사회가 일심동체가 되어 미국의 의회를 움직여 일제의 군 성노예만행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킬 전망이 높은 ‘역사적’ 기회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핏줄이 이 같은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욱 실망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조승희 군이 바로 미국적 ‘마카로니’ 폭력 문화의 피해자인지 모른다. 한인이라는 신분은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의 ‘주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이민을 온 조 군은 한국적 가치체제의 교육을 받을 기회에서 벗어나 의사소통이 단절된 고립 속에서 영화, TV 및 게임 등에서 폭력이 영웅시 되는 미국의 퇴폐문화에 기식(寄食)해 자랐다. 즉 그는 미국의 마카로니 웨스턴의 일탈(逸脫)한 산물일 따름이며, 그가 어느 특정국적의 소유자라는 점은 사건의 본질과 전혀 무관하다.
오늘 우리가 처한 왜곡된 문명을 직시해 보자. 평화수호의 제1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군을 수십만씩 동원하여 9.11테러와 전혀 무관한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을 대량학살하고 있는 국가폭력이 비판 없이 일상으로 수용되고 있는 사회현실과 버지니아 텍의 총기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폭력을 영웅시하는 환경에서 조 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를 고립시킨 주변에 대한 ‘복수’에 대해 어떤 편향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희희낙락 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문화에서 이교도에 대한 폭력을 정의로 간주하는 오도된 인식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만일 이라크인과 아프카니스탄인들이 이교도가 아니고 기독교인들이라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학살하고 있는 현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여느 종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같은 가치편향적 환경이 이번 총기사건의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태풍 카타리나의 비극에서도 보였듯 미국 자본주의의 ‘깨진 거울,’ 즉 무기를 일반 상품처럼 파는 것이 ‘시장자유의 원칙’이라고 호도하는 총기 및 무기생산업체의 막강한 로비와 이에 영합한 정치권, 그리고 긴급사태 대처에 실패한 경찰이 이번 사건의 ‘공범’이다.
이 사건은 또한 가치체계가 무너진 사회환경이 극단적 선택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냉혹한 사실을 증명한다. 즉, 미국에 대한 선망이 미국의 퇴폐문화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할 때, 그리고 일례로 무절제한 선교제일주의를 내세운 ‘부자’ 교회가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난한’ 교회의 교인을 유인해 와도 ‘선교’ 잘 하는 교회로 간주될 만큼 교인들의 비판의식이 마비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 한인사회가 굴절된 물질주의에 빠져 정의를 외면할 때 제2, 제3의 조승희를 얼마든지 ‘생산’해 낼 수 있는 개연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 조승희 군이 남긴 메모를 일별하면 그가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 배경에는 미국 사회의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이 원인제공의 일부인 점도 엿보인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이 우리 한인이민사회에 가치체계를 재점검하는 자성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동포 이민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로마’가 지금 불타고 있다. 우리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와서 성실하게 노력해서 일군 오늘에서 실낙원(失樂園)의 유민(流民)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아니 미래를 향해 웅비(雄飛)해온 우리 동포들이 끝없이 추락하는 신천옹(信天翁)의 비운을 맞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두 합심하여 진화작업에 나서야 하겠다.
<이선명/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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