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호출장이 나왔다. 배심원 봉사가 시민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다. 배심원 임무는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몇 주일 혹은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나는 다운타운에 있는 법원에 출석 했다. 대기실은 불려온 삼백여 명으로 초만원이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기 이름이 불리어지지 않으면 그날로 배심원 임무는 다하는 것이다. 전례로 보아 점심시간만 넘기면 그럴 확률이 높다. 점심시간 십 분을 남겨 놓고 담당자는 내 이름을 불렀다. 일일 배심원의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여태껏 호출장을 세 번 받았지만 호명되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시작한지 두 해 밖에 되지 않은 세컨드 오피스가 마음에 걸렸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오피스를 기약 없이 비워 둔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호명 된 사람은 모두 서른여섯 명이다. 안내자를 따라 우리는 함께 재판실로 향했다. 나는 지금의 내 얼굴 표정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아마도 걱정으로 경직 된 안면과 긴장으로 앙다문 입술이 남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것 같았다. 속은 타도 겉이 쿨 하게 보일 방법은 없을까. 입을 약간 벌리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면 얼굴이 좀 여유롭게 보이려나.
지정된 방에 도착해보니 벌써 재판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 판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변호사와 피고는 왼쪽에 검사는 오른쪽에 서 있다. 중앙에는 서기 두 명이 서로 마주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변호사는 사오십 대의 흑인 남자이고 피고는 흑인 청년이다. 검사는 예상보다 좀 색다른 모습이다. 검은 생머리가 어깨너머로 흘러내리고 피부가 고운 백인 여성이다. 패션쇼에 출현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팔등신 미인이다. 그녀에게는 부드럽고 우아한 인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데, 왜 그녀는 딱딱하고 험난한 검사의 길을 택했을까. 무거운 법정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부드럽게 느껴졌다.
내가 속해 있는 서른여섯 명 중 열다섯 명이 배심원으로 선정 될 것이다. 열두 명은 정식이고 세 명은 예비라고 한다. 우리들 중 반은 배심원 석으로 가서 먼저 자격 심사를 받고, 나머지 반은 방청석에 앉아 심사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번 재판은 마약에 관련된 것이라고 판사가 미리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약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심사받는 자들은 그들의 친구나 친척이 관련된 것까지도 털어 놓았다. 그런 경험이 이번 사건에 편견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많은 얘기 거리는 경찰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은 사례이다. 재판이 시작되면 경찰이 증인으로 나올 것인데 그 증인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개인 신상을 호소했다. 한 학생은 시험 날짜가 겹친다 했고, 한 신사는 이사 날짜가 겹친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두 여자도 있었다. 무슨 사연이기에 판사 앞에 다가가 하소연 하다말고 울어버리고 말았을까.
모든 얘기의 결론은 한가지로 모아졌다. 다들 자기는 이번 사건의 배심원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배심원단에서 빠져 나가려고 마치 미꾸라지처럼 굴 때, 드물긴 해도 월급이 보장된 직장인이나 은퇴한 사람은 잉어나 붕어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배심원에게 지급 되는 일당은 십오불이다. 게다가 재판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 임무를 여유있게 받아 드리는 그들의 시민 정신이 부러울 뿐이다.
결국 결격 사유가 인정된 세 명이 퇴장당하고 열다섯 명만 남았다. 원하는 숫자의 배심원이 구성 된 것이다. 방청석에 있는 우리까지 심사해야 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 검사가 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 퇴장시키니 변호사도 질세라 두 사람을 탈락 시킨다. 배심원 구성이 끝난 후에라도 검사와 변호사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퇴장시킬 수 있는 모양이다. 배심원들의 평결은 만장일치로만 가능하다. 검사나 변호사가 각자의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승리의 꽃밭에 잡초를 남겨두려 하겠는가. 배심원 구성이 다 끝나기도 전에 퇴근 시간이 되었다.
다음날 모두가 다시 모여야 한다. 간밤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생각해보았다. 마약이나 경찰에 관한 얘기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못하니,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영어 부족과 오피스 사정이다. 아내는 영어에 승부를 걸어보라고 권했다. 나에게는 그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나는 본래 영어 발음이 시원찮으니 조금만 더 엉터리로 발음하고, 말을 더듬거리며 하되 듣는 사람이 답답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마음이 오죽 다급하면 그런 충고까지 할까 만은 나는 판사 앞에서 차마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늦깎이 이민자로서 영어에 대한 어려움과 오피스 사정을 얘기 했다. 판사는 내 얘기에 대한 답변을 질문으로 대신했다. 당신은 여기서 대학을 졸업했는가? 대학에서는 영어로 공부했는가 한국말로 공부했는가? 치과의사 면허 시험은 보았는가? 영어로 보았는가 한국말로 보았는가? 당신은 자기를 찾는 급한 환자를 따돌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의사들은 평생 배심원 임무를 수행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내가 판사 앞에서 너무 궁상을 떨었나 싶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수치심은 시민의 의무를 소홀이 여긴 죄 값으로 여겨야 할까보다.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 사라져 버리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완전히 포기해 버리니 걱정도 사라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배포마저 생겨났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배심원 선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말의 잔치와 중년을 넘긴 여인의 흐느낌과 잡초 뽑기는 여전히 계속 되었다. 결국에는 배심원 후보 숫자가 모자라 새롭게 서른여섯명이 불려와 방청석에 대기 중이다. 마약에 관련 된 피고인 한사람의 진실을 밝혀 보려고 배심원 후보 칠십 두 명이 동원 된 셈이다.
배심원 석에 자리가 비면 방청석에서 대기 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워가며 심사는 계속 되었다. 드디어 검사와 변호사가 모두 함께 만족할 만한 배심원단이 구성되었다. 한 사람이 더 있는 열여섯 명이 최종적으로 남았다. 마지막 기회에 변호사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놀랐다. 그리고 고마웠다. 꽃으로 여기고 여태껏 두었는데 다시 보니 내가 잡초였던 모양이다.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지만, 겉으로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배심원 석을 빠져 나왔다.
배심원 탈락을 너무 섭섭히 여기지 마시오.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오. 배심원 석을 떠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듣는 판사의 위로 말이다. 떠나는 참에 나도 한마디 하고 싶었다. 죄인이시여, 알고 보니 내가 당신의 봉이로소이다.
<강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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