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고 재능있는 여대생 딸을 누군가가 ‘곱슬머리 창녀’라고 모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인종과 성차별이 불법으로 명시된 미국에서 동료나 부하직원을 ‘곱슬머리 창녀’라고 떠벌리고서 살아남을 직장인도 없을 것이다.
럿거스대학 여자농구팀을 수백만명이 듣는 방송에 대고 ‘곱슬머리 창녀들’이라고 비하한 라디오 토크쇼의 진행자 단 아이머스도 11일 현재 반쯤 죽은 상태다.
30여년 경력의 아이머스는 미국 방송계의 일급 스타로 꼽힌다. 그가 진행하는 뉴욕 CBS산하 라디오의 아침 토크쇼는 70개 방송국과 케이블TV MSNBC를 통해 전국에 방송된다. 작년 한해 뉴욕 라디오 한군데서만 그의 프로가 유치한 광고는 1,130만 달러에 달했다. 인기가 높은 만큼 영향력도 크다. 그의 프로에 출연하려는 ‘명사’들이 줄을 늘어섰다. 존 매케인이나 존 케리 같은 정치가뿐이 아니다. 주류언론의 스타 저널리스트들도 대부분 그의 게스트 명단에 올라있다.
지난 4일 그 전날 치룬 대학여자농구 결승전 소식을 전하던 아이머스가 내뱉은 저속한 발언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이번주초 CBS와 NBC에서 2주간의 정직처분이 내려진후 해고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11일 NBC가 아예 방영중단을 발표했고 대기업들이 잇달아 광고를 취소하는가 하면 인터넷 찬반논쟁은 1주일 넘게 뜨겁게 열을 뿜어대는 중이다. 아이머스 자신도 자기 프로와 흑인민권운동가 알 샤프턴의 방송, NBC의 투데이쇼등에 나와 벌써 며칠째 사과에 사과를 거듭하고 있지만 사태는 아직 가라앉을 기미가 아니다.
아이머스는 유능하고 스마트한 방송인이다. 자선에도 적극적이고 인종에 관계없이 어린 환자들을 챙기는 그의 따뜻한 관심도 소문나있다. 그의 단골 게스트인 매케인 상원의원은 사과한 아이머스를 그만 용서하자고 당부하지만 그러기엔 아이머스가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다. 그의 모욕적인 차별 발언은 상습적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는 매춘부’라는 패러디송으로 공격당했고 자넷 리노 법무장관은 ‘덩치 큰 레스비안’이란 모욕을, 흑인여성과 결혼한 한 장관은 ‘정글 열정’에 빠졌다는 야유를 감수해야 했다. 그의 입에 걸려들면 유대인 경영진은 ‘돈만 긁어가는 개xx들’, 팔레스타인인들은 ‘냄새나는 짐승들’로 추락해야 했다. 10여년전 뉴욕타임스의 백악관 출입 흑인여기자가 그의 프로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 때도 방송을 통해 비열한 보복이 가해졌다. “뉴욕타임스는 참 대단해, 청소부에게 백악관 취재를 시키다니…” 흑인여자라면 청소부 출신이 아니겠느냐는 노골적 비아냥이었다.
온갖 차별 발언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점점 도를 더해가는 자극적 언행을 방송사는 물론이고,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언론인과 정치가들까지 함께 즐기며 혹은 못들은 척 넘기며 막지 않았다.
하긴 저속하고 자극적인 언어로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는 것이 토크쇼의 속성이다. 또 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청취자들이 그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이 요즘 세태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런 토크쇼의 생명은 날카로운 풍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풍자와 악의는 다르다. 힘센 자들의 오만과 위선을 찌르고 꼬집는 것은 풍자이지만 힘없는 보통사람들의 출신이나 외모, 그 자체를 빈정대는 것은 악의적인 모욕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피흘리며 아파하는데 ‘재미로 그랬는데, 뭘’ 낄낄거리기도 한다. 무례를 넘어 천박하고 야비하다.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마구 달리던 아이머스가 결국 사고를 쳤다. 상대를 잘못 택한 것이다. 겨우 열여덟에서 스무살,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올A의 성적, 음악천재, 예비의사, 걸스카웃…모두 뛰어난 인재였다. 언더독으로 결승전까지 올라간 자랑스런 이들이 축하와 찬사를 누리려는 순간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더러운 폭탄을 맞은 것이다.
이틀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들 중 한명은 자신들이 아이머스를 직접 만나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나를 알게된 후 자신의 발언이 큰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하고 싶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그래서 너무 아파요”
아이머스는 일단 다음 월요일부터 2주간의 정직에 들어간다. 그런데 혹시 그 2주간이 무급휴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푹 쉬고난 후 훨씬 더 유명해진 채로 돌아와 “잠깐 수모”의 대가로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은 영향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 다른 DJ들이 같은 ‘실수’를 모방하려 하지 않을까.
그의 해고를 둘러싼 찬반논쟁은 아직도 뜨겁지만 결정은 CBS의 자체조사와 평가후 내려질 것이다. CBS에서도 NBC에 이어 현명한 결정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재미로 마이너리티 때리기’, 그것으로 돈벌기는 이제 그만 멈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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