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도 ‘사각지대’라는 것이 있다. 내 영혼을 불안하게 혹은 편안하게 운행하는 요소가 숨어서 드러날 때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어느 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가슴 저 아래서 신비의 언어로 또는 음률로 요동치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른 새벽 빛의 파장이 뿌리 즈음에 숨어 있다가 쏴아~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운전을 하다보면 차 옆에 바짝 붙은 물체가 채 눈에 뜨이지 않는 ‘사각지대’라는 곳이 있다. 목을 90도 획 돌려서 재빨리 돌아보아야만 안심할 수 있는데 며칠 전 남편이 그곳을 잘 볼 수 있도록 조그만 볼록렌즈를 붙여 주었다. 그런데 통 써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대충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속이 편했던지 그것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물체에 지레 놀라는 가슴이 반갑지만은 않다. 해서 그냥 달고만 있다는 걸로 내심 안전하지 한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곁에 달려있을 지도 모를 위험이나 변화를 모른 체 하고 싶어 하는 본성이 나에게도 있다.
영혼에도 ‘사각지대’라는 것이 있다. 내 영혼을 불안하게 혹은 편안하게 운행하는 요소가 숨어서 드러날 때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어느 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가슴 저 아래서 신비의 언어로 또는 음률로 요동치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른 새벽 빛의 파장이 뿌리 즈음에 숨어 있다가 쏴아~하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나름대로 오랜 준비 끝에 드러난 그 새벽 한줄기를 그제야 아! 빛이구나 하고 알듯이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한발 더디기만 하다. 보이지 않던 그것이 ‘인식’의 이름을 달기까지가 나에게 ‘사각지대’에 해당한다.
산다는 게 하도 지지부리 늘어놓은 것이 많아서 그것들을 모조리 인식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마당에 그 숨겨진 근원까지 파고 들 거야 뭐 있을까, 귀찮은 마음이 냉큼 사고(思考)를 앞지른다. 바로 ‘사각지대’에 대한 나의 게으름이다. 그러다 보니 내면으로의 여행에 차질이 많다. 너나없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아래서 더 이상은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싶은 마음이 커져가고 그저 내 육신 하나 반듯하게 지키는 것도 벅찰 때가 많다. 거기다 오랫동안 감추어져왔던 내면과 만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며 마주 하기조차 꺼림칙한 지 참으로 성과 없는 일에 매달리는 헛된 일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사실’들이 궁금해졌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심연, 그 아래에서 지금도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그 힘의 정체가 궁금해졌고 그 실체가 앞으로 나의 미래에 창출할 또 다른 결과를 주목한다.
그 어떤 것도 ‘금 나와라 뚝딱’ 하듯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을 터이니 투박한 돌 한 덩어리가 시시각각 반짝거리는 금덩어리로 변하는 그 길고도 경이로운 과정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숨겨진 자신과 드러난 자신이 어떠한 경로로 일체감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길목에 서서 지켜보고 싶어졌다.
그러자니, 무수한 두들김과 일그러진 나의 모습이 왜 보이지 않겠는가. 썩어져야 할 것과 퍼 담아야 할 것들을 솎아 내다보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왜 이빨 사이로 삐져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정직한 현상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임으로써 한없이 형편없는 나 자신을 만나서 탄식하고 그럼에도 여태껏 별 흠집 없는 인생으로 나를 지켜준 창조주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또 다시 꽃 이파리로 흐드러지는 봄을 맞으며 ‘치유와 성장 세미나’ 가운데 들어섰다.
가슴 저 구석에 남의 일 인양 던져놓았던 내면의 행사들을 꾸리꾸리 다시 펴 보기로 한다. 수십 번 이사를 하고도 꽁꽁 묶은 채 또 들고 났던 보따리를 이제야 풀어본다. 나 자신도 모르는 틈에 오고 갔을 무수한 시간의 흔적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할 테니 마음을 다 잡고 호흡을 가다듬어 볼 일이다. 기어이 죽지 않고 살아나올 나의 자아와 마주하기가 어디 쉽기야 하겠는가 싶어서 말이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있을 테고 채 폭죽도 터트리지 못한 축제가 미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돌부리에 막혀 영 흐를 기미가 없는 관계들이 군둥내 나는 둥지 속에서 터를 잡았을 게고 왜 보다 살뜰하게 보살펴주지 않았느냐고 어린 내재아(內在我)가 뾰로통하게 나를 대할 것이다. 참 살아있는 동안 모른 채 지나칠 수만은 없는 숙제가 ‘사각지대’에 숨겨져 있다.
볼록렌즈를 달지 않았다면 우연에라도 맡길 일을 코 옆에 붙어서 보라고 재촉하니 어쩔 수가 없다. 보듬는 손길이 없어 오랜 기갈로 신음하는 내면의 처량한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야 마냥 그래라 할 수만은 없다. 내 영혼의 ‘사각지대’를 마치 남의 일로만 볼 수는 없게 생겼다.
찾아나서야 할 것들로 새삼 발걸음이 바쁘다. 결국 이 또한 내 인생에 보다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간곡한 나의 의지이며 그동안 무수히 받기만 하였던 창조주의 은혜, 그에 대한 내 감사의 보답이기 때문이다.
약력: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제1회 수필공모 당선.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이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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