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부한 표현이 된 듯도 하지만 세계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 간, 문화 간의 교류는 증가하게 마련이므로 세계화는 꺾을 수 없는 대세인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문화의 변용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문화의 얼굴[容]이 바뀐다[變]는 말로 영어로는 ‘acculturation’이라고 한다. 문화의 변용은 넓은 의미에서는 문화의 동화(assimilation) 현상도 포함하지만 엄격한 의미로는 한 문화의 요소가 다른 문화에 의해 수용되는 과정에서 그 원래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
문화의 변용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가 다른 나라에 가서 정부 주도의 절충식 시장경제로 바뀌는 것이라든지, 중국음식이나 피자 등이 미국에 와서 ‘미국화’되는 것, 독일어로 ‘일(하다)’의 뜻인 ‘arbeit’가 한국, 일본 등에서 ‘아르바이트, 알바’가 되어 젊은이들의 부업을 의미하게 된 것 등이 모두 문화적 변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변용 현상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혜라고 생각하겠다. 가령, 한국에서도 미국 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내용과 의미가 변질되기도 한다.
‘촛불시위’를 예로 들어보자. 촛불시위는 영어의 ‘candle light vigil’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candle light’은 물론 ‘촛불’이지만 ‘vigil’이란 말이 한국에서 ‘시위’로 변용되었다. 원래 ‘vigil’은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든가, 누가 죽었을 때 시체와 혼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운다든가, 적을 경계하기 위해 자지 않고 경비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반면 시위는 글자 그대로 남에게 위(威)세 또는 위력을 보여준다[示]는 말이다.
촛불로 밤을 밝혀 보호하고 추념한다는 방어적 의미가 힘을 과시하는 공격적 의미로 바뀌었으니 이는 커다란 문화적 변용이다. 촛불은 어둠을 밝힌다는 뜻이지 힘을 과시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서 ‘촛불시위’라는 말의 모순을 읽을 수 있다.
문화가 교류할 때 서로 다른 언어가 합쳐져 새로운 말이 생기는데 그 과정에서도 원래의 의미가 문화적으로 변질된다. 요즘 한국어와 영어의 합성어가 크게 늘고 있다. 그 중에는 PC방(房), 컴맹(com盲), 다운(down)받다 같이 비교적 ‘온순한’ 합성어들도 있지만 웰빙족(wellbeing族 -‘웰비잉’이 정확한 발음), 디카족(dica族), 사이(cy)질, 뽀샵(phoshop)질, 악플(惡ple), 성파라치(性parazzi) 등과 같이 ‘난폭하게’ 변질된 합성어들도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사전적으로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문화의 바다를 건널 때 다른 뜻으로 변하기도 한다. ‘공룡’과 ‘신화’가 좋은 예다. 공룡은 물론 영어로 ‘dinosaur’이지만 한국에서 ‘그는 공룡이다’라는 말과 영어로 ‘He is a dinosaur’란 말은 전혀 다른 뜻이 된다. 한국에서 공룡이란 말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키지만(아주 큰 기업을 공룡기업, 몸이 유난히 큰 선수를 공룡선수라고 하는 것처럼), 영어의 ‘dinosaur’가 갖는 비유적, 관용적 의미는 뭔가 예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몸집 큰 프로선수를 가리켜 한국식으로 “He is a dinosaur”라고 했다면 미국인들은 그가 ‘한 물간 선수’라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신화란 말도 한국에서는 기적 같이 멋지고 훌륭한 일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지만, 영어에서 신화를 가리키는 ‘myth’는 터무니없는 엉터리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가령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2002 월드컵 축구 4강 신화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말을 영어로 그대로 옮겨 ‘Korean people still talk about their national soccer team’s myth of the 2002 World Cup Final Four’라고 하면 미국인들은 ‘월드컵 4강의 터무니없는 엉터리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다’고 오해하게 된다.
여러 가지로 바쁜 세상이지만 계속되는 문화의 교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문화의 변용 현상에 대해서도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세상이다.
<장석정> 일리노이주립대 경영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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