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죽음을 위한 전투기계들의 합창, <300>
1. <300> 와 <시체들의 새벽>을 넘나드는 시체, 팬텀들.
<300>가 지구촌을 논쟁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새벽의 저주>의 잭 스나이더(Zack Snyder) 감독이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원작을 영화한 <300>는 지난 3월 2일 베이 에리어를 선두로, 같은 달 14일 그리스, 필리핀, 싱가폴, 말레이시아, 대만, 그리고 한국에서 각각 개봉한 이래, 박스 오피스 점유율 50% 이상, 2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를 이어가는던 중, 이란의 상영금지 처분과 인종차별논쟁의 핵이 되고 있어, 다시금 폭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실 영화 자체는, 원작 <300>만큼이나 폭력적 비쥬얼로 차고, 넘치는 그렇고 그런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 속의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단지 1시간 58분간의 비쥬얼을 위해 피흘리며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 배치된 일종의 오브제에 불과할 뿐, <300> 그 어디에도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았다.
<300>의 스토리 라인은 황당할 정도로 단순하다. 아테네를 침공한 크세르크세스(Xerxes) 왕의 백만대군은 레오니다스왕의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과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충돌하게 되고, 3일 간에 걸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유혈이 낭자한 전투씬을 1시간 58분간 끝도 없이, 지난하게 비쥬얼화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잭 스나이더의 필모그라피(filmography)는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은 것이어서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빅 스크린 데뷰작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는 <300>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과 같은 것으로써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의 1978년 작품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는 이항대립적 선악구도의 차용, 주제학적 무게감의 부재, 현실 정합성의 무시, 육체를 통해 재현하는 폭력적 비쥬얼에의 편집증적 집착 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는 조지 로메로가 <시체들의 새벽: Dawn of the Dead>을 통해 재현하는 알레고리(주렁주렁 메달린 살점은 타자의 욕망이며, 타자의 심장을 찢고 살점을 뜯어 먹는 일은 인간 무의식 속에 잠복한 공포와 경멸을 포식하는 행위이다) 즉, ‘타자의 정치학’이라는 고차원적 나레이션을 송두리째 괄호 속에 넣어버린다. 마치, <300>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나는 적어도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 Sin City>의 새로움과 리들리 스콧의 <글라디에이터:Gladiator>의 무게감이 직조해 낸 혼종성(hybridity)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판타지(Fantasy)적 세계의 재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감독은 말하는가? 1시간 58분간의 지루한 전투씬이 재현하는 반복적 비쥬얼에 식상했던 내게는 감독의 말조차 한갖 변병처럼 들린다. 왜냐고 묻는가? 이미 우리는, <반지의 제왕: Lord of the Rings>이라는 대작을 통해 판타지 무비 또한 ‘응시하는 자를 반성하게 하는 메타 픽션’으로서의 스크린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2.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영상은 카메라 렌즈와 피사체간의 역학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물리적 결과물이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방식과 인간의 시선이 사물을 관찰하는 방식의 수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개의 시선 사이에는 레테의 강만큼이나 넓고 깊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카메라는 인간의 일상적인 시선이 포착하고 재편한 세계에 대한 문법을 새롭게 재편성한다. 우리는 이것을 시선의 정치성, 혹은 미학의 정치화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상은 인간의 시선보다 더욱 재현적인 것이라 말한다.
대중이 영상 속의 피사체를 모든 각도에서 꼼꼼히 들여다 보는 일은, 물론 불가능하다. 피사체가 카메라의 렌즈에 의해 재현되는 그 순간부터, 대중은 기껏해야 카메라에 재현된 피사체의 단면, 즉 감독의 ‘의지적 재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카메라의 앵글을 결정짓는 감독의 시선 즉, 의지는 곧 정치성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지점에서, 드라큘라를 생각하는가.
동서 냉전 시대를 이끄는 가장 강렬한 비쥬얼을 들자면, 다름 아닌 드라큘라의 검은 망토와 희생자의 붉은 피로 얼룩진 폭력의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트란실바니아 국경, 드높은 칼파치아 산맥의 드라큘라 성의 성주인 드라큘라 백작은 팽창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이다. 그것은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절대악으로써의 공산주의 사상이자, 서방 세계를 공산주의라는 질병으로 ‘감염’시키는 에피데믹(epidemic)의 진원지이다.
“너희는 어떤 생물의 피도 먹지마라.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다.그것을 먹는 자는 모든 겨레 가운데서 추방되리라. 레위기 17장 14절에서 처럼, 드라큘라는 금지된 음료(?)인 피를 마심으로써 서방의 모든 겨레로부터 추방되어, 타자화되고 대상화된 공포의 이미지이자 배타적 정치학의 알레고리이다.
나는 <300> 속에 잠복한 또 다른 드라큘라의 검은 망토를 본다. 물론, 영화 속 300인의 스파르타인들의 망토는 드라큘라 백작에게 물린 희생자의 하얀 목을 타고 내리는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으로 시종일관 펄럭인다.
주지하다시피, 의미란 다름 아닌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풀이하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나는 <300>을 통해 카메라의 앵글에 의해 재편성된 하나의 의미를 본다. 그것은 드라큘라의 이미지와 너무도 닮아 있어서 더욱 놀라웁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300> 이르면, 드라큘라에서의 감염의 공포와 배타의 정치학은 더욱 구체적인 양상으로 전도된다.
그리고, 감염에 대한 병적 공포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호모 섹슈얼한 이미지와 결합되어 에이즈라는 병리학적 공포로, 배타의 정치학은 페르시아군대를 돌연변이 변종들의 집단으로 묘사함으로써 인종학적 이데올로기로 발전된다.
훌떡 훌떡 벗어제낀 300인의 스파르타인들이 구현하는 육체적 건강성(사실, 162센티미터가 당시 그리이스 남자들의 평균신장으로써, 이것은 사실 ‘난장이 똥자루’를 약간 상회하는 키이다. 그들은 이러한 신장의 열세를 비쥬얼로 만회하기 위해 말총이 달린 투구를 썼으며, 30킬로에 육박하는 갑옷으로 전신을 보호했었다 ) 과 남성성이 재현하는 서방세계의 이미지는, 세르크세스 대왕과 페르시아 군대가 재현하는 중성성, 여성성, 비건강성을 극대화한다.
결국, <300>는 모든 이분법적 이항대립의 이미지들 즉, 페르시아VS 스파르타, 동방VS 서방, 중성성VS 남성성, 병든 육체VS 건강한 육체 등등의 알레고리를 통해 섹슈얼리티 속에 인종과 계급의 지문을 진하게 날인한, 이른바 젠더의 정치학과 결합된 인종학적 이데올로기의 ‘왜곡된 교과서’이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한다, 모든 영화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영화를 영화로 보아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말하는, 자칭 영화 애호가들의 입장은 영화를 탈정치화하고 탈역사화하는 무리수를 두는 엉터리 장기꾼이나 게으르고 소심한 대중 일반을 양산할 뿐이다
3. ‘나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300>을 감상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
남의 나라 일이었음에도, 그리이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목숨을 바쳤던 당대 낭만파 시인의 대표주자였던 바이런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대지여! 그대 가슴에 묻힌 스파르타 병사들의 유솔을 돌려주오!
300구 유골 가운데 3개만이라도 돌려주어
제 2의 테르모필레를 만들게 해주오!
바이런, <그리이스의 섬들>
그리고, 알고 있는가? 히틀러 또한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겼다.
우리 제6군 병사들은 또다른 300 스파르타인이다
히틀러, <스탈린그라드 전선의 독일군에게 보내는 전언>
영화란, 의문의 여지도 없이 현실 그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영화 한 편이 세계를 단번에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300>을 두고 인종학적 이데올로기나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대입하는 일도 어쩌면 한갖 헛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영화의 세계는 시뮬라르크이자 팬텀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짚고 넘어가자. 영화 속에서, 오리엔탈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흑인 트렌스 젠더처럼 진하게 화장한 얼굴(왜, 이 씬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는지, 왜,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노래가 생각났는지모르겠다, 나는.)에 이상한 장신구를 칭칭 감은 블랙 누드로 나타난다던지, 변종 돌연변이 집단인 페르시아 군대가 닌자 의상을 입고 칼춤을 추거나 몽고족이 회색 코끼리를 타고 나온다든지 하는 황당무개한 영상들은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백컨대, 나는 <300>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역사 정합성이라든가 현실 정합성의 잣대를 들이대고자 하는 욕망조차 없다. 페르시아 군대가 100만이면 어떠하고, 20만이었다면 어떠하랴. 테르모필레에서 2만이 아니라 20만의 페르시안이 도륙당했다 한들 또 어떠하랴. 사실, <300>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의 아테네 정벌이 페르시아의 속국인 이오니아에 대한 그리이스의 내정관섭으로 점화된, 선친 다리우스 왕의 유지를 받들어 똑똑하고 치밀한 크세르크세스 왕의 준비된 작품이었다 해도, 나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
문제는 경박한 감독의 무식함이나, 뻔뻔한 상상력이 아니라, 우리가 일체의 성찰적 시선을 배제한 채 수용하는 미국식 자본주의 이론, 신경제체제의 폭력성, 우생학적 파시즘, 문화적 파시즘, 젠더 이데올로기, 인종학적 이데올로기일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욕망의 실현과 재생산을 위해 이미지 산업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300>은 바이런의 낭만적 싯구가 아니라 히틀러의 전언에 근접해 있으며, 이미 영화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 되기에, 나는, <300> 속 유령들의 미친 칼싸움을, 김기림의 시처럼 “나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300>이 간과하고 지나갔던 가장 중요한 그 무엇, ‘마음’과 ‘정신’과 ‘감정’ 또한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었기에, 영혼을 잠식당한 채 육체만 살아 광란하는 ‘전쟁 좀비(zombi)’ 같은 이들 300인의 스파르타인들이 눈물 나게 가여웠다면 약간 신파가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두시간짜리 총천연색의 꿈에 불과하다할지라도 꿈은 현실에 대한 또 하나의 역설적 재현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영화 앞에서 불편하게 만든다.
<정영화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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