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외교관 직책은 무엇일까. 최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한 말이 힌트가 될 것이다. “라이언과 잘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대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지난 며칠 연방의회에서 이라크 철군 압력이 입법화되고 있는 동안 지구 저편에선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가 바뀌었다. 파키스탄 대사였던 라이언 크로커가 이슬라마바드에서 직접 바그다드로 날아가 새 이라크 대사로 부임했고 전임 잘마이 칼릴자드는 26일 무거운 마음,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그다드를 떠났다. 떠나긴 했지만 그는 아마도 계속 미국의 이라크 정책에 깊숙이 관여할 것이다. 끝까지 의회의 인준을 못 받은 강경 보수 존 볼튼 대신 지난 1월 유엔대사로 지명되었기 때문이다.
21개월 전 뉴스의 각광을 받으며 바그다드로 부임했던 칼릴자드는 독특한 외교관이다. 아프간 태생으로 84년 미 시민권자가 되었다. 투박한듯 하지만 사교적이다. 개성이 강하고 말도 많다. 격의 없고 친밀해 상대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부시행정부 내 골수 네오콘 중 한명이면서도 상황에 따라 실용중도 노선도 서슴치않고 택한다.
지난해 백악관의 낙관론과는 달리 “이라크 침공은 미국이 잘못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라고 솔직히 시인한 것도 칼릴자드였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순간 종파 분쟁이라는 끔찍한 재앙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 평화를 꽃피우는 꿈이었다.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간 전쟁 후 아프간 대사로 부임했던 그는 아프간 새정부 수립의 막후 역할을 수행한 다음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이라크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슬람 테러에 대한 부시의 처방은 잘마이 칼릴자드 뿐이냐?”는 진보 쪽의 비아냥이 나왔을 정도다. 사실 중동 경험이 별로 없는 폴 브레머와 존 네그로폰테 등 두명의 전임 이라크 대사는 확실히 실패한 인사였다. 무엇보다 그들과 이라크 지도자들은 거리감이 천리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곧장 업무에 돌입했던 칼릴자드는 달랐다. 이라크인들에게 중동계인 그는 ‘우리 중 하나’였다. 아랍어에 능통하여 통역이 필요없었고 고유의 블랙티를 함께 마시며 격의없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백악관 인사이더였던 칼리자드는 부시와 라이스의 강력한 신임을 과시했고 그의 막강한 재량권한과 열정은 이라크 지도자들의 신임을 샀다.
그의 이라크 사태에 대한 처방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반목하는 각 종파간 교량 역할을 자처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무장한 SUV에 탄 그는 화해를 실현시키려 이라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파워브로커답게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져 형식적으로라도 각 종파간 화합만 이룰 수 있다면 이라크 국민들도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의 지원으로 실권을 장악한 현 정부의 시아파보다 사담 후세인을 추종했던 수니파 저항세력 달래기에 주력했다. 그들을 알카에다와는 다른 ‘화해 가능한 저항세력’이라고 부르며 그들 끌어안기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수니파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시아파였지만 아버지가 수니파였다. 미국대사가 수니파 쪽에만 선다면서 알말리키 수상의 시아파들이 정면 반발하고 나섰다.
그의 노력으로 수니파의 공직진출 제한을 완화시키는 법안과 통합정부의 민감 사안이었던 원유수입 배분에 대한 새 석유법안이 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지만 그가 꿈꾸었던 보통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아니, 훨씬 악화되었다. 부임하던 날 1,324명이었던미군 전사자 수는 그가 바그다드를 떠나던 날 3,228명으로 늘어났고 같은 기간 이라크인 희생자는 6만으로 추산된다.
그의 에너제틱한 낙관주의도 이제는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공중곡예를 하듯 ‘근세 미국 외교사에서 가장 힘든 임무’를 마치고 바그다드를 떠나던 날 고별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민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대사만이 아닌, 중동인으로서의 안타까움도 섞였을 것이다. 보복폭력의 악순환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측근에게 털어놓았던 그를 가장 지치게 한 것은 ‘자신들 조국의 안정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하는 이라크의 지도자들’이었다.
엊그제 상원에서 반란표를 던지며 민주당과 손잡고 철군시한 명시를 요구한 공화당의 중진 척 헤이글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 사태에 대한 군사적 해결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라크는 그곳에 살고 있는 2,500만 이라크 인들에 속한 것이다. 미국에 속한 것이 아니다”
칼릴자드의 꿈은 결국 언제이건 미국이 아닌, 이라크 인들 자신에 의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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