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초의 베스트셀러는 토마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다. 1776년 1월 나온 이 책은 영국과 갈라서느냐 마느냐를 놓고 망설이던 13개 식민지 여론을 독립 쪽으로 돌려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책의 판매 부수는 최고 60만 부로 추산되는데 당시 인구가 300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문맹을 빼놓은 성인 남성 치고 이를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페인은 이 책에서 영국과의 독립이 어째서 불가피한가 하는 점을 조목조목 들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이유가 영국은 툭 하면 유럽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해 영국에 속해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이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의 고립주의 성향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 것은 1796년 조지 워싱턴이 쓴 고별 연설에서다. 그는 여기서 동맹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토마스 제퍼슨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어떤 외국과도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미국의 고립주의 분위기 때문에 제1차 대전 때 윌슨은 독일이 루시타니아 호를 격침시켜 수많은 미국인 사망자가 나오기 전까지 개입하지 못했고 제2차 대전 때 루즈벨트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고 나서야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이 외국과 맺은 첫 동맹이 1949년 건국 170년 만에 체결한 나토였다는 사실은 미국이 외국 일에 나서기를 얼마나 꺼리는지를 보여준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회교 극렬주의자들은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사우디아라비아의 코바 타워 테러,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테러, USS 코울 공격 등 크고 작은 도발을 계속해왔다. 그럼에도 미국이 대응을 꺼리자 마침내 9/11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공격으로 나타났지만 이 또한 마지못해 한 듯한 인상이 짙다. 9/11 테러의 온상인 아프간을 공격하는데도 처음에는 반대 목소리가 높다 미군에 별 피해 없이 탈레반이 쫓겨나자 그제서야 너도나도 지지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4년 전 바그다드에 사실상 무혈입성하면서 치솟았던 미국인들의 이라크 전에 대한 지지는 현재 부시 일가족을 빼고는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창 싸울 때의 가톨릭과 신교보다 사이가 나쁜 수니와 시아파가 오손도손 민주정치를 펴나가기를 기대했던 어리석음에 초반 바그다드 치안을 장악하지 못한 무능, 미국이 망하기를 고대하는 이란과 시리아의 준동 등 여러 요인이 겹쳐 발생한 사태지만 이로 인해 미국의 고립주의 성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북한이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국무부의 마지막 네오콘’으로 불리는 로버트 조셉 차관이 국무부를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의 입안자로 리비아로 가던 핵 장비를 공해상에서 차단해 결국 리비아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지난번 2.13 6자 회담 합의가 “범죄적인” 북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고 자신이 지지할 수 없는 정책을 채택한 부시 행정부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임 이유다. 도널드 럼스펠드, 폴 월포위츠, 존 볼튼, 루이스 리비에 이은 그의 사임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 네오콘의 입지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고무된 김정일은 미국이 사실상 그의 요구를 다 들어줬는데도 방코 델타 아시아 자금이 아직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담 도중 김계관을 소환시키는 등 배짱을 튕기고 있다. 적당히 핵을 폐기하는 척 하면 미국은 못 본 척 할 것임을 알아 버린 것이다.
좌파들의 ‘미 제국주의’ 성토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덩치에 비해 미국만큼 덜 제국주의적인 나라도 드물다. 로마를 위시해 영국, 프랑스, 일본에 이르기까지 역대 제국들이 정복한 나라를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독일과 일본 등 미국에 의해 정복당한 나라들은 경제 강국으로 부활했다.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아니라 고립주의로의 회귀다. 과연 미국은 ‘성채 아메리카’로 퇴각할 것인가.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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