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
올바른 자녀양육에 필수적
한국이 연 수입 3만달러대의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다고 하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전쟁의 피해가 매일의 생활에서 느껴졌었던 적이 있었다. 길거리마다 상이군인과 걸인들이 넘쳐흘렀었고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이화동 위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다닥다닥한 낙산이 있었다. 또 그나마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리어카라고 하는 끌 것에 ‘이동주택’을 만들어서 낮에는 가게로 쓰고 밤에는 주거지로 쓰면서 옛날 서울대 법대의 담 옆 넓은 길옆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대의 어느 하루, 학교에서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우리 집 골목 어느 집 대문 처마 밑에서 걸인 한 가족이 그날 구걸해서 얻은 음식을 모아 놓고 막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옆을 지나가는 나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 중 작은 아이가 “형, 이거 정말 맛있다 형도 먹어봐!”하면서 군대용 짠밥통에서 김치조각을 꺼내 건져주었는데 지나가던 나에게까지 군내가 확 풍길 정도로 시고도 신 김치였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받아서 “야 정말 죽여주는구나!”라고 맞받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어쨌든 지금 기억하는 것은 그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모여서 오순도순 신김치를 반찬으로 저녁을 먹는 모습이 쓸쓸한 우리 집 밥상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6.25의 상처는 많아서 삼촌이 처자를 버리고 인민군으로 자원해 월북했나 하면 우리 모친 외가는 모두 인민의 적으로 총살을 당했고, 한 때는 모두 고향을 잃은 피난민으로 전락했었다. 그래서 먼 친척 가까운 친척 13명이 서울 충신동 한 게딱지만 한 집에 모여서 사랑방에는 미장원까지 차려놓고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그 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당시의 이화동에 모두 부러워할 만큼 큰 집으로 이사를 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이미 큰누이는 시집을 가고 없었고 형은 미국으로 유학, 할아버지는 족보하신다고 동분서주하셨고 아버지는 늘 사업하신다고 전국을 누비고 계셨으니까 막상 저녁 때 집에 오면 혼자서 덩그마니 저녁상을 받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반찬이 고급이면 무엇하랴, 쉬어 꼬부라진 김치라도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먹는 것이 얼마나 좋아보였던지 이것이 내가 이날 이때까지 신김치를 특히 즐기는 것과 결코 상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한국말로는 ‘family’를 ‘가족’, 혹은 ‘식구’라고 하는데 내가 맘대로 하는 해석은 ‘가족’이란 지붕 밑에 돼지가 있는 것이고 ‘식구’는 한솥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라는, 즉 ‘family’를 ‘family’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먹는 것이 지붕 밑에 있고 때가 되면 밥상에 둘러앉아 같이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6.25 전쟁을 치른 20년 후에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을 우리 세대는 겪었는데 그것은 미국으로의 이민인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찾아와서 어느 정도의 성공은 이루었지만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겪은 고통은 6.25전쟁 때 겪은 고통보다 크면 컸지 절대로 작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집도 한 때 이런 이민의 진통을 겪었는데 그 때의 취미(?)가 아무 법정에나 가서 아무 상관도 없는 케이스를 들으며 머리를 식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중년을 넘은 한 아주머니가 내게 와서 사정을 하는데, “우리 아들은 아주 착한 아이인데, 글쎄 저 경찰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으려고 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아저씨가 좀 뭐라고 하고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주세요!”라고 말이다.
검사측이 진술을 들어보니 그 아들이라고 하는 소년이 상습 절도범들과 함께 길거리에 주차된 차의 스테레오를 떼어내는 것을 근처 주민이 창밖으로 보고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긴급출동을 했는데 일당 중 망보고 있던 아이가 미리 알려줘서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주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주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는 아스팔트길에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살점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기민하게 채취한 경찰이 분석을 해본 결과 그 아이의 살과 일치를 한다는 것이 증거로 제출되어 있는 것이었다.
체포 경위도 도주에 사용한 차가 노란 캐딜락이었는데 올포인트 불레틴에 올린 결과 마침 퇴근하던 경찰이 바로 그 캐딜락의 뒤에 있었고 그 경찰이 적시에 이 사실을 경찰에 통지, 일당이 어느 아케이드에 내리는 곳까지 미행을 해서 일당이 안심을 하고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통지 받은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일망타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노란 캐딜락에서 도난당한 라디오가 증거물로 발견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이런 사정을 다 설명해 주고 나니까 그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고 “우리가 이 고생을 다 누구 때문에 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하더니 조금 가라앉은 후 하는 얘기가, “사실 우리도 돈벌이 하느라 열심히 뛰다 보니까 밥도 제 때 못해 주는 것이 측은해서 용돈을 많이 주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지갑에 둔 돈, 서랍에 둔 돈이 없어지는 것 같아 좀 이상했었는데 바쁘니까 돈 관리를 더 조심하고 말았죠. 그랬더니 이제는 집에 있는 물건들이 이것저것 없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던 것이었다.
이 아주머니가 그 아들과 같이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그 아들이 탈선을 하게 된 사유 중에 그냥 지나쳐도 될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 계시지 않을까?
2,000년 전 교회가 처음 뿌리를 내리며 부흥할 때에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사도행전 2:42)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부흥의 요건과 건전한 자녀 양육의 절대요소 중 빼놓을 수없는 하나가 같이 함께 먹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그것이 쉬어 꼬부라진 신김치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내주에도 한 번 더 자세히 나누어보고자 한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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