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시내에는 현재 154개나 되는 외국인 동상이 있다. 특히 각국 대사관이 밀집한 Embassy Row에 많이 있다. 대사관에서는 한국이 세계 속에서 작지 않은 위상을 갖게 되었고, 미국에 200만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는 마당에 우리도 그러한 동상을 하나쯤 세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를 위해 대상인물을 연구, 검토하는 한편 미 공원당국, 워싱턴 시청 등과 동상설립을 위한 법규와 절차 등에 대해 협의해 왔다.
다른 나라들은 정부가 독자적으로 세우거나 몇 명의 독지가나 재단 등이 세운 것이 대부분이다. 검토를 하면서 우리의 경우에는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우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구상이 알려지자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그간 많은 분들이 ‘장소, 대상인물, 꼭 인물상이어야 하는가, 한인사회가 나서야 하는가’ 등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내셨다. 한인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 미 공원당국과 협의한 결과 ‘장소’는 정부기관인 대사관이나 영사관 앞에 세우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많은 미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공공적인 장소에 세우면 좋겠지만, 그것은 희망일 수는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연방정부나 워싱턴 시에는 좋은 지역에 비어 있는 땅도 없거니와, 미국 역사에 직접 기여한 인물이어야 하고 의회의 결의까지 있어야 하는 등 절차도 복잡하여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최근에 세워진 영국의 처칠, 인도의 간디, 노르웨이의 왕비상 등이 모두 자기나라 대사관 앞에 있다. 물론 LA의 안창호 선생 동상처럼 한인사회가 자체적으로 땅을 마련하여 세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대상인물’로서 서재필 박사가 가장 무난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민족의 수난을 생각나게 하는 한국 현대사의 인물보다는 이순신, 세종, 심지어는 단군 등이 더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가진 것 같다. 일응 그럴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오래 전 역사상 인물의 동상을 외국에 세우지는 않는다. 그러자면 예를 들어 이순신 동상이 미국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인물은 125년간의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인들은 물론 미국인들도 다소는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이 나을 것이며, 그 대상으로는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선생 등 지도자들이 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이승만 박사의 경우 독립운동과 건국의 공적이 크지만 이후의 정치적 독재와 부패 등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과거 이 박사 생시에 세워진 남산과 광화문의 동상들이 4.19혁명 이후 끌어 내려지고 백범과 이순신 동상으로 바뀐 사실을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하는 일이다. 이 박사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잘 알지만, 아직 대다수 여론은 아닌 듯 하다. 물론 한국에서와는 달리 미주에서는 한인 이민사 등 또 다른 이유로 그 분을 기릴 필요가 있을 텐데, 그러한 일은 앞으로 한인사회가 의견을 수렴하여 따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 서부지역에서 흥사단을 떨쳐 일으킨 훌륭한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은 LA에 동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를 감안해 볼 때 미 동부지역의 지도자였으며, 이승만과 안창호 선생의 선배이자 스승인 서재필 박사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꼭 인물상이 아니라 이민사를 말해 주는 일반인들의 군상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의견이다. 그런데 한인 이민들의 역경을 기릴 수 있는 그러한 조형물은 이제는 커질 대로 커진 한인사회가 뜻을 모아 한인 밀집지역 같은 곳에 세우면 더욱 뜻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대사관이 하는 일에 한인사회가 들러리 설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들도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온 문턱 높은 관청에 대한 심정적인 거부감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심정이다. 개인적으로 공직자로서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관민 불신문화의 문제인 것 같다. 다만 대사관은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이 동참한다면 더욱 좋겠다는 선의에서 한인사회에 말씀드린 것이다. 그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어서 당초부터 경비 문제로 손을 벌릴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단체나 개인의 너무 많은 성금은 거절해야 할 판이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생각이 계신 분들에게 억지를 쓸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매일 출퇴근길에 다른 나라 인물들의 동상을 보며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을 생각해 본다. 미국 사람들은 흠이 있더라도 수많은 지도자들을 기리는데, 지도자를 기리기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 비판이 더 많은 우리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정치지도자든 사회지도자든 근세사에서 우리에게 훌륭한 분들은 없는가. 유교 봉건체제에 처음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뿌리를 심고, 대외의존보다는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독립협회를 세우고,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을 중시하여 독립신문에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최초의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수십 년간 미국에 한국을 알리며 독립을 주장하고, 분단이 아닌 통일된 조국을 희망한 사심없는 지도자, 서재필 박사를 생각한다.
최근 LA에서는 한국공원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한인사회가 날로 커지는 이곳 워싱턴에도 앞으로 한국공원이나 조형물 건축, 이승만 박사 등 지도자들을 기리는 사업들이 한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권태면/워싱턴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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