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집을 사고 이사를 한곳이 토랜스지역 바닷가 근처 마리코파(Maricopa)라는 동네였다. 잔디에 물을 주고 있는 어느 주말 오전 시간이었는데, 지나던 차가 멈추면서 웬 동양여인이 한국분이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까 반갑다는 말과 자기는 아래 아래 건너 집에 사는 Mrs, Choi(최여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눈 것이 최여사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30년 전만 해도 내가 이사한 동네는 주로 백인들이 사는 동네여서 흑인이나 멕시코인들은 거의 없었고 간혹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새치처럼 한국인들은 아주 드물게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타국 땅에서 이웃으로 동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의지 되는 일인지 모른다. 동족이란 이유가 살붙이에게나 느낌직한 본능적인 친밀감을 갖게 했다. 더욱이 최여사와는 같은 또래는 아니나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 많은 공감을 발견하며 마음이 소통해서 깊어지는 정이 들었다.
세상에는 예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끄는 여자들이 있는데 최여사가 바로 그런 여자였다. 최여사는 유학파다. 가주에 있는 명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마치 안개꽃처럼 그녀의 몸집은 꽃잎처럼 작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특이한 사람됨의 인품이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배경이 되어주며 어떤 울림의 영향력을 주는 지혜롭고 총명한 여자이다. 특히 상대의 말을 감정과 감동으로 경청해주고 그녀의 검소한 생활태도는 그녀의 삶이 번영을 누리고 편안하게 사는데 근원이 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주말 토요일 아침이면, 으레 “레나엄마! 커피 합시다”라는 최여사의 전화를 받는다. 모닝커피를 함께 마시며 우린 속내말도 서로 하고 기쁨과 고민도 함께 의논하면서 이민의 삶에 피로감, 회의감을 가시게 했고 외로움도 덜어냈다. 한국말로 실컷 이야기하는 그 시간은 생활의 활력과 즐거움을 갖는 이민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가슴 후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람이 자기 직업의식은 못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최여사 역시 그랬다. 전직 대학교수 경력을 가진 최여사는 나와 대화를 나눈 끝에 꼭 빼놓지 않고 하는 소리는 “질문 있으세요?”였다. 그때마다 그 훈장 버릇 또 나온다고 핀잔을 주며 우린 한바탕 소리 내 웃곤 했다.
70년대는 이민 온 대부분의 한인들이 사업으로 새롭게 미국땅에서 뿌리 내리기가 버거워 남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이 다들 저 살기 바쁘던 그런 시절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계속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업을 하던 최여사도 적성에 맞지 않는 일에 결단을 내리고 내가 다니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한 배를 탄 직장 동료로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고 코리안인 우리끼리 우리말로 담소를 나누며 점심을 먹는 함께 라는 끈끈한 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나는 오랜 세월 영주하며 정들었던 마리코파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고, 최여사는 은퇴를 하며 직장을 떠났다. 각자의 인생은 너무 빨리 돌아 잠시라도 헤어지면 만나기가 쉽지 않고 힘들었다. 최여사와도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사이가 되어 특별한 절기나 기회가 있을 때 만나게 되었다.
내 은퇴고별 파티가 있는 날 최여사를 초청 했고 그녀는 파티에 참석해 내 은퇴를 함께 축하해 주었다. 파티가 끝나고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실 때, 며느리가 선물로 사준 예쁘고 멋진 고급스런 옷이 있는데 모처럼 옛 동료들도 만나는 파티라 그 옷을 입고 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레나 엄마가 주인공인 날인데 내가 시선을 끄는 옷차림을 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입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배려가 내 마음의 뿌리부터 움직이게 하는 찡한 감동을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인기인이 되고 싶은 욕심, 또 뭔가 보여주고 싶은 과시욕이 있다. 알면서도 자제 하기 어려운 것이 과시욕이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사람들은 나만의 개성, 나만의 색깔을 운운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혼자 튀고 혼자 돋보이고 싶어 기를 쓰는 세상이 아닌가.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 흔치 않은 세상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남을 위해 자기의 감정을 희생할 줄 아는 마음 , 타인에게 무엇이 되어 주려고 애쓰는 마음, 이 모두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성숙한 사람의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하며 아름답게 한다.
저명한 법률가 이며 위대한 사업가인 오엔 D 영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최여사는 내가 육십 평생에 사귄 사람들 중에 드물게 정신세계가 깊고 건강하며 판단이 흐리지 않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다. 배려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 같은 최여사를 내 이민의 삶속에서 만난 인연은 다른 사람이 금싸라기 땅을 갖은 것만큼 가슴 뿌듯한 행운이며 기쁨이다.
<김영중>
약력: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제1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미주펜문학상. 한국순수문학 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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