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20년을 지나 수십년 묵은 와인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과 향기를 갖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탄탄하게 영근 포도열매가 으깨지고 발효되고 오크통에서 익은 다음 병속에 갇힌 채로 수십년의 세월을 견디고 나오면 그 기나긴 생명력과 인고의 맛에 경의를 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와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잖고 사려 깊어진다. 젊은 와인이 어린아이처럼 거칠고 발랄하다면 숙성한 와인은 차분하고 조용해진 맛, 여러 맛을 가졌으나 하나로 그러모아 둥그렇게 조화된 맛이다. 향은 복합적인 부케와 함께 부드럽고 섬세하게 변해간다.
묵은 와인의 매력에 한번 빠지고 나면 갓 나온 와인에 대해서는 여간해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미국에서는 오래된 와인을 맛볼 기회가 매우 제한돼있다. 와이너리 역사 자체가 짧은데다가 미국인들의 와인문화가 몇 년 되지 않아서 오래 전 생산된 와인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수십년에서 100년 묵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가격이 병당 수천 내지 1만 달러이상 호가하는 이유도 그런 희소성 때문이다.
쿠바산 고급 시가 역시 와인 못지않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예우를 받는다. 질좋은 프리미엄 시가는 1~2년도 모자라 8~10년씩 숙성시키며 최고품 중에는 30~60년 이상 묵은 것도 있다.
이런 시가는 담배잎의 재배에서부터 수확, 발효, 숙성의 단계는 물론이고 하나하나 손으로 말아서 또다시 숙성시킨 다음 박스에 담겨져 시장에 나올 때까지 사람 손을 무려 40여 차례나 거친다. 담배잎을 발효시킬 때는 커다란 가마니 속에 쌓아놓고 화씨 140도 이상의 온도에서 땀을 뻘뻘 내도록 6주이상 묵힌다. 이것을 때때로 힘센 장정들이 있는 힘을 다해 철썩철썩 치대어 산소 접촉을 시키면서 암모니아와 니코틴을 빼낸다. 그런 다음 매스터 블렌더가 각자 맛이 다른 담배잎들을 적절히 섞는데 그 배합 솜씨에 따라 시가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
잘 숙성한 시가는 푸른 기가 도는 흰 연기를 내며 고도로 정제된 순한 향기와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이런 시가는 한 대에 수백달러, 케이스 당 수천달러에 거래된다.
한국에서는 350년간 맥을 이어오는 간장 한 병(1리터)이 500만원에 팔렸다고 최근 언론들이 보도했다.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 보성 선씨 종갓집에서 나온 이 간장은 지난해 현대백화점에서 열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을 통해 처음 소개됐는데 전시가 끝난 뒤 모기업 회장댁에서 비서를 보내 현금을 내고 사갔다고 한다. 선씨 종갓집 며느리들이 대를 이어 관리해온 이 간장은 매년 담근 햇간장 20ℓ가량을 묵은 간장에 섞어 보관하는 방식으로 350년간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다.
충남 논산군 노성면 교촌마을 파평 윤씨 종갓집에도 ‘전독간장’이라 불리는 200년 묵은 장이 있다. 올해 여든다섯의 종부가 관리하는 이 장 역시 새로 담근 장을 묵은 간장에 부어 되매기 장을 만드는 전통을 200년간 따르고 있다.
수백년 묵은 명장에서는 어떤 맛이 날까? 구수하면서 짜지 않고, 약간은 달콤한 맛, 코리코리하면서도 감미로운 향,‘흰 밥에 간장 한숟갈 넣고 쓱쓱 비비면 다른 반찬이 아무것도 필요없는 맛’이라고 종갓집 며느리들은 전한다.
와인과 간장과 시가의 공통점은 숙성한다는 것이다. 오래 묵을수록 좋은 맛을 내고, 그럼에 따라 가치가 올라간다.
오래 숙성한 것의 특별함은 무엇보다 깊고 그윽한 향기다. 그것은 세월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 모든 것을 포용한 냄새, 숙성이 없이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향이다.
때때로 그런 향기는 와인과 간장과 시가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맡아진다. 나이 들면서 성숙해지고 현숙해진 사람. 돈보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자기를 추슬러 단정하게 사는 사람,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 자기 분수를 알고 인정하는 사람…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을 만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지만 향기는커녕 악취를 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느껴진다. 모든 것이 순간지향적인 인스턴트 세계, 디지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한 세월 무르익고 숨이 죽기를 기대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인가? 그러면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 익었는가, 묵었는가, 향기 나는가?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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