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상자가 창조할 수도
#아름다움의 기준
“아름다움은 어디든지 굴러다닌다.” (존 듀이) “나다니엘이여 신을 도처에서 찾아라” (앙드레 지드)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산재해 있다고 현인들은 말한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만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 인간, 자연 등의 대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미술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미술에서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인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그 영역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미술품의 가치 평가기준
18세기 이후 영역 넓어져
시대따라 감상자따라
아름다움을 보는 눈 달라져
아름다움에는 주관적 입장과 객관적인 측면이 있다.
주관적인 것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자기 판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고, 나에게 아름다운 것이 남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객관적인 것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정해져 있어서 그 기준에 따라 보면 누구나 똑같이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균형 잡힌 여인의 몸을 ‘팔등신’이라 하여 머리 크기가 몸 전체 크기의 1/8일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하나의 미적 기준이다. 또 그리스 시대의 건물들이 모두 ‘황금분할법’에 따라 지어진 것도 3대5의 구도가 가장 안정감 있고 편안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객관적 미의 기준은 18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나 그 이후 아름답다는 개념의 영역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인상주의에서 후기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문이 활짝 열려서 객관적인 아름다움에서 주관적인 아름다움으로, 구상적 표현에서 추상적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예술품의 가치가 오로지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둘 중 하나였는데 18세기 이후 미술품 감상에 다른 가치요소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이감, 놀라움, 위축됨, 두려움… 등의 느낌이다.
이상하다, 그런데 매력이 있다. 추하다, 그런데 자꾸 끌린다. 무섭다, 그런데 자꾸 보게 된다. 볼썽사납다, 그런데 왠지 마음을 건드린다…
전에는 아름답고 명료했던 가치가 뒤집어지면서 불균형하고, 불안하고, 불결하고, 미완성이며, 암시적이고, 위험적인 요소들도 미술의 가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피해왔던 요소, 생각 못했던 요소들을 미술에 끌어들이기 시작하자 세상이 달라지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것이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장을 열게 된 시작이다.
시대 순으로 미술 사조를 들여다보면 18세기 이전까지 아름다움이란 원본을 얼마나 잘 모방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즉 플라톤의 ‘모방설’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안전한 미술이론이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예술가의 생각과 의도,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는가가 중요해지면서 ‘표현주의’가 등장했고, 20세기 이후엔 구조주의가 지배해 왔다. 구조주의란(Structurism)란 작품과 작가와의 관계를 배제하고 일단 화가가 붓을 놓으면 작품은 커뮤니티의 재산으로서 독립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고 믿는 사조이다.
가장 최근에는 아름다움의 가치는 감상하는 사람의 평가(evaluation)에 달려있다고 보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즉 감상자가 어떻게 요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에 따라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술품의 아름다움은 작품 안에 있느냐, 아니면 내가 갖고 있어 내가 창조하느냐, 그 둘에 따라 감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예술작품의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계속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다.
<에두아르 마네 작‘폴리 베르제르의 술집’(Bar at the Folies-Bergere·1882년)>
거울속 바텐더 추상적으로 표현 큰 논쟁 유발
그림 놓고 저마다 다른 해석… 정답은 없어
오늘은 이 그림을 좀 자세히 공부하자.
마네(1832~1883)의 최후의 대작인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구상처럼 보이지만 구상의 논리를 깨고 추상적 차원으로 들어간 이 작품은 당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심미안의 변화, 의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림 한가운데 여자 바텐더가 서있다. 그녀의 얼굴은 우수에 깃든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찬 바의 풍경이 비춰진다. 거울 오른쪽으론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그녀는 어떤 남자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자. 바텐더는 분명히 혼자 정면을 보고 서 있는데 거울 속에서는 남자와 대화하고 있다. 앞에서는 꼿꼿한 자세인데 거울 속에서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인 것처럼 보인다. 또 그녀의 뒷모습은 분위기로 보아 슬프기보다 고객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고, 그녀의 날씬한 허리는 좀 더 살쪄 보인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일단 각도가 정상이 아니다. 정면을 보고 있는 바텐터를 정면에서 그렸다면 그녀의 앞모습은 남자 고객의 뒷모습에 가려 있어야 하거나, 거울 속의 모습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어야 한다. 이를 놓고 여주인공이 갖고 있는 두 가지 모습을 다른 공간에 그렸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빛이 휘고 꺾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몇 십년 전에 마네가 간파해 여러 각도에서 보는 이미지를 동시에 그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에 거울이 없다고 보면 정상적인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뒷모습의 여자를 또 다른 바텐더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설은 거울이 있다는 것으로, 마네가 이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갖가지 가설이 등장했지만 결국 정답은 없다.
마네는 당시 화단을 놀리듯 정상적이지 않은 그림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잘 알려진 ‘풀밭 위의 식사’에서는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과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인이 피크닉을 즐기고 있고, 벌거벗은 창녀 ‘올랭피아’(Olympia)는 그 어느 소녀보다 청순한 모습으로 흑인 하녀의 시중을 받고 있는 등 통념을 깨는 그림들을 그렸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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