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cross-cultural communication),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피부색 언어 종교 등 공존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 추구해야
다음은 미국의 한 인류학 교수가 자국의 학생과 인도 학생과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미국학생: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인도학생: 인디언. (Indian, 인도 사람을 의미함)
미국학생: 어느 보호지역인가? (아메리칸 인디언 보호지역을 의미함. 이 미국 학생은 인도가 어디 있는지 전혀 모름)
미국학생: 인도에서는 아직도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가?
인도학생은 정말 황당한 질문에 짜증나는 반응을 보인다.(My Freshman Year by R.Nathan)
다소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평균적인 미국인과 학생들의 타 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잘 알려져 있다. 가끔은 나 자신도 이곳 미국에서 South or North Korean? 하고 묻는 미국인들의 황당한 지적 과시(?)를 위한 질문에 당황한다. 이러한 문화적 몰 이해의 예는 단지 미국인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는다. 세계화와 함께,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문화와 문화의 접촉은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 대신에 전 세계에 더 많은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자신들의 문화와 세계관으로 ‘다른 문화’에 주관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라는 매우 편협 되고 닫힌 세계관으로 표출된다.
최근 타임지는 (2007년, 1월 22일 자)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대해 우려와 기대의 특집기사를 내 놓았는데 역시 미국과 중국의 자문화 중심적인
인식차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중국의 전지구적인 무차별 경제적 진입과 군사력 증강에 대해 미국은 인권문제로 제동을 걸고 있다. 여기서 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극명한 시각차가 드러난다. 미국에서 동아시아 학을 강의 하는 레이 초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의 ‘인권’은 외교 및 통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중동제국에서 석유가 중요한 자원이듯이 중국에서 사람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다. 따라서, 중국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서양이 바라는 바가 인권이라면 서양으로 하여금 그 대가를 치르게 하며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인권이라는 목적을 유리한 수단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한 나라에서는 ‘인권’의 차원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경제적 ‘자원’으로 정치적으로 각각 다르게 인식 된다.
타 문화와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우리 언어의
이항 대립에 대해 ‘전략적 해체’ (strategic deconstruction)를 감행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는 무의식적으로 이항 대립적 작동(the mechanism of binary opposition)에 의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예를 들면,
중심국 - 주변국
우리 - 그들
남성 - 여성
백인 - 흑인
종교인 - 비종교인
영어 - 한국어
이러한 대립항의 형상은 고도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생산해 내며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각각의 대립 항들은 다른 한 쪽에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며 특권적 지위를 차지한 말들은 한 동안 문화적/사회적 위계질서를 재생산하게 된다. 현재 우리의 국가적, 지역적 갈등, 종교, 인종 문제들은 결국 이러한 메커니즘에 기인한다. 이렇게 인위적 대립을 위해 구조화된 이원론적인 경계는 해체화 전략을 필요로 한다.
결론적으로, 세계는 피부색, 언어, 종교 등의 여러 문화적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할 때 의미가 있다. 좀더 거시적 안목에서 인류는 한 식구,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 (unity in diversity)을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세계화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넘어 다문화에 대한 세련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세계시민(global citizen)으로 거듭나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만약, 세계화의 진행이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일 언어와 문화를 강조하는 일차원적 세계를 지양한다면 이미 감지되고 있는 지구촌의 갈등은 그 폭을 더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하나의 문화와 언어만 존재한다면 이는 지적 재앙이 될 것이며 바람직 하지도 않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와 목소리를 수용하여 이 세상을 좀더 아름답고 조화롭게 가꿔 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의 바벨탑의 이야기는 신의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재
해석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종덕 객원기자>. jdlc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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