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법살인’이라고 불려온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은 32년 만에 당시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한 보수 언론은 ‘인혁당 사건 재심, 무죄선고의 의미에 대하여’라는 제 하의 사설에서 “이번 판결로 30여 년 동안 반국가 사범의 누명을 쓰고 있던 피해자 8명과 유가족의 명예가 회복됐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시대의 암흑으로 부르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처절한 일이다.--”라고 썼다. 같은 하늘아래 동시대를 살아온 나도, 불의를 못 본 척 한 ‘공모자’같아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민 혁명당!,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수사 당국이 조작해서 명명(命名)한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미 죄는 잉태된 것이고, 단죄는 기정 사실이었다. 요즈음 같아서는 웃고 넘길 일도 그 당시는 큰 죄가 되었다. 떳떳치 못한 국가권력이 체제의 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영업자, 회사원, 농부, 노동자 등 평범한 사람들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 한마디, 욕 한번 잘못 했다가 유신 헌법이 만든 긴급조치에 의해 10년쯤은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유신의 명분은 ‘통일’이었으나, 실은 박정희 영구집권의 시나리오였다. 국회를 해산하고 통일주최국민회의를 만들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으니 말이다. 그 체제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희생되었으나,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한마디로 유신 안보를 위해 제물이 된 희생양이다. 불의의 권력과 사법부가 공모해서 선량한 백성을 죽인 희대의 사건이다. ‘긴급조치’라는 전근대적 사법절차를 거쳐, 정보기관이 희생자를 선별하고, 고문 조작을 통해 받아낸 허위진술에 따라, 검찰이 이를 기소하면, 법원 역시 정권에 요구에 부응하는 판결을 내리는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인 사건이다.
내용인즉, 도예종, 김용원, 여정남,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 우홍선, 이수병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결성, 북한지령을 받아 이철, 유인태 등이 주도한 유신 반대 학생단체인 민청학련을 배후 조정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잡아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상기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어처구니 없게 대법원의 상고가 기각 된지 18시간만에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된 ‘사법 살인’ 사건을 말한다. 이와 같이 어이없는 사형 집행에 대해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의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반대 운동이 확산되던 74년 중앙정보부는 학생운동 세력인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산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원래 인민혁명당은 이보다 10년 전인 64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북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진 대규모 공산 지하조직이라고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런데, 정보부가 10년 만에 다시 이를 ‘재건위’로 조작해 부활시킨 후, 민청학련과 연계가 있는 것처럼 꿰어 맞춘 것이다. 이것이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해서, 이 억울한 재판이 32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 기막힌 사건 앞에 민주주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둔갑했고, 재갈 물린 언론은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방조했다.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면서, 거대한 권력에 맞서 다윗과 골리앗의 외롭고 힘 든 싸움을 해온 이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오글 목사라는 분이 있다. 74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해 강제 추방된 목사다. 시노트 신부도 있다. 이들은 미국에 온 후에도 의회증언에 나가고, 시카고 등 전국을 다니며 한국의 인권실태를 고발했다. 그때 나는 한 교회모임에서 ‘어느 민족 누구에나 결단 할 때 있나니-“ 숙연한 마음으로 찬송가를 부른 기억이 새롭다. 또 유가족들이 모든 이들의 외면과 경멸 속에 “쌀알을 모래알처럼 씹으며 산 32년” 동안의 인고의 세월을 함께 친구가 되어 정의를 파헤친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지학순, 함세웅, 문정현 같은 신부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진실은 살아 있으며, 정의는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는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축하를 보내며, 억울한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죽음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 아울러 100건이 넘는 사건들이 소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의문사 1호’로 꼽히는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데모 학생들을 군대로 끌고 가 고문한 ‘녹화사업’,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처형, 재야 지도자 장준하 선생 추락사 등등이 하루 빨리 법정에서 밝혀지기를 고대한다. 역사의 법정에 시효란 없다.
생존 가해자들도 직접 나서서 진실을 밝히고 참회하며 용서를 빌 것을 촉구한다. 오욕의 과거 청산을 통해 내일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일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몫이다. 오도된 역사를 바로 잡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정권의 살인으로 백성의 눈에 피눈물이 나는 일은, 한 시대의 아픔으로 마감하자.
육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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