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의 박사
“고정관념 깨뜨리면 그림이 보인다”
추상화를 볼 때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도대체 뭘 그린 거야?’‘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화가나 미술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미지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느낌도 생각도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그림의 문외한은 추상화를 감상할 수 없는 것일까?
지난 주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대표 메이 정)에서‘추상화의 담 헐기’강의를 시작한 김상의 박사는“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추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이니, 이를 버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금부터 11주 동안 김 박사와 함께 추상화의 담을 허무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미술뿐 아니라 철학, 문학, 신학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김 박사가 역사의 흐름을 짚어가며 가르쳐주는 추상화 감상법. 자, 이제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상식과 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자. 그리하여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추상화가 보이고 읽어지고 재미있어질 것이다.
16일의 첫 강의는 현재 LA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와 현대미술: 이미지들의 반란’에 관한 공부였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김상의 박사가 묻는다.
“오늘이 1월16일이니, 어제가 정월대보름이었나요?”
다들 머뭇머뭇,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는 김 박사, “대보름은 음력으로 치는 건데, 양력 정월대보름도 있나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 안도하며 ‘그럼 그렇지’의 표정이 된다.
‘양력 정월대보름’처럼 서로 맞지 않는 두 개의 단어를 합쳐 놓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동그란 삼각형’ ‘노란 목소리’ 이런 것도 마찬가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감각을 합쳐놓으니 그것들이 서로 맞지 않아 토닥토닥 싸우게 되고 급기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1898~1967)는 이러한 ‘이미지가 반역을 일으키는 세계’를 개척한 사람이다. 우리가 길들여진 관습과 가치관을 깨버리고 은유의 세계, 가정법적인 세상, 현실을 넘어서 초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일단 말이 안 된다. 파이프를 하나 그려 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질 않나, 벽난로에서 기차가 튀어나오질 않나, 집채만한 바위가 허공에 떠 있지 않나, 시계들이 축축 늘어지고 구부러져 나뭇가지에 걸려 있지 않나… 마그리트가 이처럼 말이 안 되는 그림들을 그리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이다. 어, 이거 왜 이럴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좀 더 오래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노리는 목적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과 관점을 달리 갖게 함으로써 그동안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 인생관, 우주관, 가치관이 달라지는 가능성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생전에 마그리트는 자신을 화가라기보다‘생각하는 사람’(thinker)으로 불러주길 원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 생각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직설법적인 세상이 아니라 가정법적인 세상이다. 그럴 법한, 이럴 수도 있는, 상상 속의 세상을 다음의 세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자.
■ 따라서 감상해 보세요
▲피레네의 성 (Castle in the Pyranees·1959)
꼭대기에 성채가 지어진 엄청나게 큰 바위덩어리가 허공에 떠 있다. 아래로 파도치는 바다가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간다. 상황적으로 보면 이게 말이 되는가? 피레네 산맥에 있어야 할 돌덩어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역하고 공중에 떠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상식에 도전하는 상상의 세계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겐 ‘가고 싶고 보고 싶어도 결코 갈 수 없는 하늘 위의 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백년 산속에 갇혀 있었을 성과 바위에게 바다구경을 시켜주고 싶은 욕망으로 보일 수도 있다.
또 이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며 몰입하면 내가 돌 같고, 돌이 나 같은 상태, 즉 일체감의 경지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돌덩어리처럼 느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 마음이 돌 같다고 느낄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돌처럼 단단한 힘을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엉뚱한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추상화의 묘미다.
▲고정된 시간 (Time Transfixed·1938)
20세기 초는 미술, 과학, 심리학의 분야가 혁명적일 만큼 격동의 변화를 일으킨 시기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발표된 후 세상의 토대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세계가 발표된 후 사람들은 초현실주의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세계를 넘어선 초현실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정지하고 빛이 휘고 공간이 휜다.
이 작품은 과학적 현상이 무시되는 초현실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벽난로는 불을 때는 곳인데 나무와 불은 없고 연기를 뿜는 기관차가 튀어나와 있다. 벽난로 위에 촛대가 2개 있는데 거울은 1개만 비추고 있다. 그림자가 두 종류이다. 빛이 오는 방향이 두 군데라는 뜻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크기에 관한 것이다. 기차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실물인가, 장난감인가? 사람들은 벽난로와 거울이 있는 방을 보면서 당연히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기차라면 어떤가? 벽난로는 엄청나게 큰 거대한 구조물이 될 것이다. 기준을 어디에 두고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 이미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넘나들게 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1929)
원래 제목이 ‘이미지의 반역’(Treachery of Images)인 이 그림은 LACMA가 1978년에 11만5,000달러에 사들였는데 지금은 가치를 헤아리기 힘든 마그리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철학적이다. 여기서는 그림도 이미지지만, 글자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림과 글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림은 파이프인데, 글자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니, 언어와 형상의 이미지가 싸우는 것이다.
또는 서양미술의 시작인 플라톤의 모방설을 대입해 보자.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본이 따로 있고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원본을 재현한 것뿐이라는 모방설에 따르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쉽게 이해된다.
이것은 그림이고 재현일 뿐이지 실물 원본 파이프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것’이 글자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볼 때, 글자는 당연히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상투적인 생각과 눈과 귀를 열고 해방시킬 때 눈앞의 그림 한 점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준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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