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보면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데 길게 보면 분명 역사는 발전하는 것 같다. 대통령직만 봐도 그렇다.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은 백인 남성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돼 왔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불리는 버지니아의 경우 42명의 미국 대통령 중 8명이 이곳에서 나왔다. ‘현대 대통령의 어머니’로 불리는 오하이오도 비슷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역시 8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특정 지역, 특정 계급 출신의 틀을 처음 깬 사람은 ‘서부의 사나이’ 앤드루 잭슨이다. 당시 프런티어였던 테네시에서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 잭슨의 백악관 입성은 ‘보통 사람의 시대’를 알린 사건으로 미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럼에도 그 또한 백인 남성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2008년 대통령 선거는 좀 달라질 것 같다. 여성과 흑인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미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후보로 나오지 않는 선거는 2008년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한 당이 8년간 집권하고 다음 선거에서 다시 이긴 경우는 1988년 아버지 부시가 유일무이하다. 그만큼 사람들이 한 당이 오래 권력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2년 가까운 시일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 부시나 공화당의 상태로 봐서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고 민주당 경선의 승자가 다음 백악관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 자리를 놓고 힐러리 클린턴(59)과 배럭 후세인 오바마(45)가 다투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사실상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오바마 가족의 별명은 ‘미니 유엔’이다. 우선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 유학생이었다. 하와이 동서 문화 센터에서 캔사스 출신 백인 여성인 오바마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이 둘 사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바마가 두 살 때 이혼한 후 아버지는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다 케냐로 돌아갔고 오바마가 21살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오바마 어머니가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도 인도네시아 유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이 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고 오바마가 34살 때 암으로 사망했다. 이 오바마의 이복 여동생은 캐나다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남성과 결혼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오바마는 한 때 마약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버드 법대에 진학, 흑인으로 처음 권위 있는 교내 법률 잡지(Harvard Law Review) 편집장이 된다. 나중에 법률 회사인턴으로 들어온 역시 하버드 출신 토종 흑인 변호사와 만나 두 딸을 두고 있다. 연말연시 파티라도 할라치면 아프리카와 아시아, 미국과 캐나다의 흑인, 백인이 한데 모인다.
이런 인물이 미국 최고위직인 대통령에 도전한다는 것은 10~20년 전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냥 한번 해보는 출마가 아니다. 현재 출사표를 던진 8명의 민주당 대선 후보 중 오바마의 인기는 힐러리 바로 다음이며 투표할 가능성이 많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힐러리와 대등한 승부를 벌이고 있다.
선거는 뚜껑을 열어 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힐러리가 유리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오바마의 강점은 참신함인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희석될 것이고 경험 부족 등 약점은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조직과 자금, 경륜에 있어 비교가 안 되는 힐러리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유권자의 절반이 넘는 여성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10%선에 불과한 흑인이 될 가능성보다 높다.
그러나 힐러리가 경선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민주당의 ‘뜨는 별’인 오바마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를 부통령 후보로 택한다면 낡은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야말로 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힐러리-오바마’ 티켓을 민주당의 필승 카드로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는 한국 대선, 내년에는 미국 대선이라는 정치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다. 지루하지 않은 2년이 될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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