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내 파산 케이스 중 절반의 요인은 의료비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의료비로 인해 파산한 사람들의 75%는 처음 발병 당시엔 건강보험에 가입해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문제투성이로 지탄받는 미국 헬스케어제도의 실상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미국은 세계 선진국 가운데 ‘전 국민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에서 국민 수천만명이 감기가 폐렴이 될 때 까지 병을 키우고 초기 치수염 정도에 크라운을 씌우는 대신 이를 뽑아달라고 한다. 보험이 없어서다. 이런 무보험자가 무려 4,660만명에 달한다.
아직도 미국의 의료보험은 직장인이 누리는 혜택에 속한다. 다른 선진국처럼 국민의 기본권리가 아니다. 노인에겐 메디케어가 있고 빈민층에겐 메디칼등 메디케이드가 있다. 그러나 노령도 빈민층도 아니고 직장보험도 없고 비싼 개인보험은 들 여유가 없는 서민들은 기댈 데가 없다.
미국인의 평균 건강상태는 선진국 그룹에선 하위권에 처져있는데 의료비 지출은 세계에서 가장 많다. 2005년 2조달러를 기록했다. 1인당 평균 6,697달러다. 다른 선진국 평균 2,500달러의 배가 넘는 액수다. 그러니 무보험자에 비하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 유보험자들도 허리가 휜다. 지난 10년간 보험료가 87%나 올랐다. 임금인상률은 20%에 머물렀다. 게다가 이들도 한순간 실직하면 무보험 그룹으로 추락한다. 직장 잃은 근로자들이 첫 번째로 꼽는 걱정이 건강보험이다.
헬스케어제도는 미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에 속한다. 연방적자 같은 추상적 명제도, 이라크전쟁 같은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이슈다. 개인의 건강과 가정경제가 좌우되는 이 근본적 사회제도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헬스케어는 연방정부가 해결해야 할 이슈다. 마지막으로 대대적 헬스케어 개혁안을 시도했던 것은 클린턴 행정부였다. 94년 전 국민의 의료보장을 약속하며 야심찬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각 이해집단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끝났었다. 보험업계와 의료업계, 진보와 보수, 기업과 노조 등 각계의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백악관도, 연방의회도 소극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정치생명을 걸아야 할 만큼 대수술이 필요한데 2008년 대선을 앞둔 상태에선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해들어 ‘전 국민 의료보험(Universal Health Care)’이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 새 화두에 불붙인 장본인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지난 주 그가 발표한 전 주민 의료보험 개혁안은 미 전국의 뉴스로 각광을 받았다. 모든 주민의 건강보험 가입 의무화다. 캘리포니아의 무보험자는 650만명이다. 돈이 없어 가입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병력과 나이 때문에 보험회사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은 건강하다며 직장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사람도 3백만명에 이른다.
슈워제네거의 개혁안은 모든 파트의 공동책임을 전제로 한다. 저소득층의 보험료는 주정부가 부담하지만 10명이상 종업원을 가진 고용주는 물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개인도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부담을 져야한다. 병원과 의사는 각각 4%와 2%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보험료의 85%는 치료에 사용해야 하며 보험사는 병력이나 나이 등을 이유로 가입을 거부할 수 없다…대충만 훑어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각 집단들의 반발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논쟁하고 타협하며 공화당 주지사의 이 개혁안은 민주당 주도의 캘리포니아 주의회를 무난히 통과할 것이다. 꼭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각 이해집단의 주장도 다 일리가 있을 것이다. 주지사의 개혁안이 통과되어 시행에 들어간다해도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전 국민의 의료보험 실현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분위기는 무르익어가고 있다. 16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선 이례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기업협회장과 노조대표가 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자리였다. ‘헬스케어를 개선하라, 이제 더 기다릴 수 없다, 중도적 초당적으로 시급히 행동해야할 때다’ 오늘은 보험 및 의료업계와 사회운동가들이 한자리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 플랜을 발표할 예정이고 연방상원에서도 이번주 고용주 부담을 강화하는 헬스케어 법안이 제안될 것이다.
진보성향의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국가가 운영하는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만이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강조해왔다. 대부분 선진국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이민출신인 슈워제네거주지사는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선 의료보험이 의식주처럼 기본적 생활조건이었다고 회상한다. 민영화가 거론되었을 때 영국의 전 총리 마가렛 대처여사는 국가안보가 달린 국방과 국민건강이 달린 의료는 결코 이익을 최우선하는 민간 기업에 맡길 수 없다고 말했었다. 미국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rokpark@koreatimes.com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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