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화제가 된 TV 사극에 ‘로마’(Rome)라는 것이 있다. HBO와 BBC가 공동 제작한 이 드라마는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중 가장 잘 만든 영화의 하나’라는 평을 받고 있다. 루시우스 보레누스와 타이터스 풀로라는 두 병사의 모험과 우정이 줄거리인데 이들이 시저와 옥타비안과 같은 당대의 거물과 함께 어울리면서 로마의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물론 픽션이지만 당시 생활상이나 로마의 역사를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 작년 첫 시즌은 갈리아 정벌에 성공한 시저가 로마에 입성한 후 폼페이를 필두로 한 공화군을 무찌르고 정권을 잡지만 결국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중 주목할 만한 장면의 하나는 시저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8년 그리스 파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를 패퇴시키는 대목이다. 당시 시저의 군대는 2만, 폼페이는 6만으로 수적으로 한참 뒤지는 데다 보급로가 끊겨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극중에서 시저의 부관은 “병사들이 배고프고 지쳐있고 적군이 몇 배나 많은 상태에서 싸움은 불가하다”고 진언한다. 이에 대해 시저는 “적은 질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뿐”이라며 전투 명령을 내리고 최전선에 직접 나가 싸운다.
결과는 폼페이군의 궤멸로 끝나고 폼페이는 딸린 병사 하나 없이 이집트로 원군을 청하러 가지만 파라오의 배신으로 오히려 목이 잘려 시저에게 바쳐지는 신세가 된다. 시저는 폼페이를 죽인 자를 효수하고 잔당들을 섬멸하는 한편 항복한 자는 후히 대접해 권력을 탄탄히 한다.
지금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고 여권 자체도 분열상을 보이며 지리멸렬이다. 반면 유력한 야권 대선 후보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인기는 50%를 넘어서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게임이 끝난 것 같고 여권은 극도로 초조해야 옳다.
그러나 서울 정치권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여권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느긋하다고 한다. 지금 높은 인기는 별 의미가 없는 데다 대통령이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아직 여러 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최근 노 대통령이 느닷없이 들고 나온 개헌론도 그 중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노 대통령이 순수하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개헌을 제안했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를 통해 그 동안의 실정이 이슈화되는 것을 막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며 야권을 흔들 수 있다면 통과 여부에 관계없이 노 대통령 말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카드는 북한이다. 대선에 임박해 느닷없이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북측으로부터 핵 폐기와 대규모 남북 이산가족 상봉 약속을 받아낸 후 이를 선거 전날쯤 성사시키면 분위기는 많이 달라질 것이란 계산이다. 이를 위해 또 몇 십억 달러를 몰래 갖다 주더라도 여권 후보가 당선된 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나중에 “핵을 폐기하려 했는데 계속되는 미국의 위협으로 어쩔 수 없이 이를 번복한다”고 한마디 하면 누가 뭐라겠는가.
여권의 또 하나 복안은 당을 쪼개 친노 반노로 싸우게 하다 막판에 가서 민주 평화 세력 대통합이란 명분으로 합치는 것이다. 싸우던 후보가 하나로 합치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지 지난 번 대선에서 한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김대업의 사촌 ‘이대업’을 내세워 이명박의 많은 재산과 축재 과정에 대한 추문을 계속 터뜨린다면 한국 유권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위화감에다 부자에 대한 거부감을 자극할 수 있다.
싸움은 반드시 병력이 많다고 이기는게 아니다. 투지와 전략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 여권의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를 해방 이후 계속 져온 개혁 세력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권력을 잃을 경우 신변 안전마저 보장받지 못할 사람도 있다. 대선 승리를 위해 못할 일이 없다. 올 대선이 그리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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