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지만 한국인이면 한국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외동포들의 참정권 허용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본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올해 말 대통령 선거부터 유학생과 주재원을 대상으로 투표권을 부여키로 방침을 정하자 동포사회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영주권자까지 투표권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와 의무’라는 법리 논쟁과는 별도로, 일부 한국 정계 진출을 꿈꾸는 세력에 의해 동포들의 실제 관심사도 아닌 이 문제가 숙원사업인양 포장돼 엉뚱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해외동포들의 참정권 반드시 쟁취해야할 당연한 권리인가, 아니면 오히려 동포사회에 ‘독’이 될 수 있는 ‘긁어 부스럼’인가. 찬·반 양론을 듣는다.
찬 성 -헌법이 보장한 권리... ‘표’로 힘 보여야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하나님은 우리 한민족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다. 그 축복이란 바로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700만 해외동포인 것이다. 남북한 인구가 7,000만이라고 할 때 해외동포의 비율은 10%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 유대인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가 된다.
이러한 막강한 인적 자원을 가진 대한민국의 재외동포 정책은 어떠할까? 한마디로 부끄러운 수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는 아마도 없는 것 같다. 700만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이 ‘재외동포의 출입국 및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700만 재외동포들의 염원인 동포청은 ‘재외동포재단’이라는 외교부 산하의 단체로 1997년이 되어서야 설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한민국의 재외동포정책이 어떻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700만 재외동포를 지원하고 관리하는 재외동포재단의 1년 예산이 241억(2006년)이라는 사실이 대한민국의 재외동포 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41억의 예산은 인구 몇 만 명의 일개 읍, 면의 수준에 지나지 않으니 재외동포의 위상은 심히 부끄러운 수준인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에 들어서 재외동포들에 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각 당에서는 새로운 법안을 상정하는 추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발의안들은 빛을 못보고 국회에서 썩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지역구 내지 이익집단의 법안을 우선시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대한민국 국회의 이기주의 때문이다.
한 표도 행사할 수 없는 700만이라는 재외동포의 숫자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을 끌고 재외동포의 권익을 보장 받기 위하여는 재외동포 사회도 하나가 되어 표로써 그들에게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즉 재외동포에게도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론의 출발인 셈이다.
참정권 이야기가 나오면 일부에서는 재외국민의 참정권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이론을 들고 나온다. 물론 직접적인 세금의 납부는 없었을지라도 미주동포 사회에서의 한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송금 액수가 1년에 5억불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안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했다거나 병역 미필자를 골라 투표권을 박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론에 앞서 본인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거론하는 참정권 부여 거부의 논리이다. 참정권 부여 거부의 논리로 첫째, 재외국민의 투표를 위한 시설 부족, 둘째, 재외국민의 참정권 실시 시 예산 부족, 셋째, 재외국민의 참정권 부여로 인한 동포사회의 분열 등을 든다.
그러나 예산만 편성이 되면 시스템 구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워지면 동포사회가 분열이 된다는 이론이야말로 대한민국 정부가 재외동포 알기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가 하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동포사회를 무시하는 이러한 발언은 삼가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본인의 바램이다. 선거 때는 갈라졌다가도 끝나면 다시 뭉치는 전통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또한 미주 동포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자랑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
재외국민에 대한 참정권 부여는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전세계 국가들의 추세이다. OECD 국가 중에서는 멕시코, 터키, 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각 나라의 형편에 맞추어 참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혹자는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면 주류사회의 진출보다는 한국 정치로 회귀할 우려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다.
첫째, 한국인은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불과 50년 만에 세계경제 11위로 진입을 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다. 재외동포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적응 발전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두고 온 조국을 위해서도 봉사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우리의 2세, 3세들은 한국 정치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심어주어 민족의 자산으로 유도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우수한 두뇌가 자산인 시대에 700만 재외동포를 어떻게 관리, 육성, 지원할 것인가를 연구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또한 700만 재외동포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세계화, 세계의 한국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700만 재외동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반 대 - 미국올때 ‘임시로’ 한국떠났던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영주권자에게 한국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해외동포들의 투표를 필요로 하는 정치인보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동포들의 목소리인 것 같다. 투표권을 부여해야 된다는 이론은 영주권자는 아직도 한국 시민이라는 점으로 보아 타당한 이론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은 점을 논 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의지(意志·Intent)를 보아야 한다. 의사가 치료도중 환자를 사망케 하더라도, 또는 운전자가 피해자를 사망케 하드라도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이유 역시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 이슈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역시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 한국을 떠날 때에 가졌던 의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이 과연 한국 정치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한국 국민으로 살려는 의지를 갖고 임시적으로 한국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한국을 떠날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노후에 한국 정치에 관심이 높아져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후자의 경우라면 한국 정치에 대한 참정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한국을 떠날 당시의 의지가 그의 법적 권리의 근원(根源·Source)이 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미국의 이민법을 위반하고 영주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Misrepresentation of intent) 역시 부당한 주장이다.
‘더렵혀진 손으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라는 ‘Clean hands doctrine’ 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둘째, 권리는 의무를 수반한다. 참정권을 주장하는 교포가 한국 정부나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한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수행하면서 투표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인가?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참정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셋째, 영주권은 과도기적 시민권이다. 영주권자가 시민권자와 다른 점은 참정권이 없을 뿐 시민권자와 같은 권리를 행사하며 법적 시한이 성숙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절차상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상(De facto) 시민권자다.
넷째, 충성심(Allegiance)은 한 곳에 있어야 한다. 영주권자로 살든, 시민권자로 살든, 미국에 사는 모든 이는 미국에만 충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한다.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것은 미국에 충성하는 마음보다 한국에 충성하는 마음의 표시다.
미국은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민자다. 만약에 모든 이민자가 각자의 조국에만 충성한다면 미국의 입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은 한국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버려야한다. 내 자신의 선택과 태도는 내 자식의 앞날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지의 세계에 도착하여 새 나라를 일구어낸 청교도정신을 새 이민자들이 계승해야 할 것이다.
1620년 11월 11일 Plymouth 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 중 반 이상이 그해 겨울에 얼어 죽었다. 다음해 봄에 영국에서 생존자를 데리러 왔으나 한 사람도 따라 나선 자가 없었다. 이러한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일구어 낸 것이다.
결코 한국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한국은 시집간 여인의 친정과도 같은 곳이다. Mayflower 청교도들도 영국을 그러한 마음으로 연민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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