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해가 아쉬움 한 자락을 눈 덮인 산정에 걸쳐놓고 뒷걸음질로 지고 있다. 앞산 눈바람에 가라앉은 잿빛 땅거미를 헤치고 작고 초라한 트레일러 하나가 들어오더니 한참 만에 왜소한 백인 노파가 사무실로 절룩이며 들어왔다.
20년을 14피트의 작은 트레일러를 풀타임 집으로 삼고 미 전국을 혼자 떠돌아다녔다는 노파는 RV 클럽 책자를 통해서 우리 산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노파는 오늘은 갈 곳도 없고 운전도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무조건 싸게 해 줘야 된다고 했다. 그 노파는 성탄절에 나에게 보내진 길 잃은 천사였다. 그 작은 트레일러가 그녀에게 꼭 필요하고 보호해 주는 집이지만 오늘은 그녀에게 큰 짐으로 보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 겨울 나그네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며 우리도 삶의 길에서 여러 형태의 짐들을 지고 때때로 뒤뚱거리지 않나 싶었다.
RV는 파트타임 여행용과 풀타임 주거용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RV를 집으로 삼고 계절 따라 미 전국을 옮겨 다니는 풀타임 RV 이용자들을 철새라고 한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라는 말은 그 철새들의 인사다. 여름 내내 120만달러짜리부터 몇만달러의 크고 작은 많은 RV들이 다녀가면서 모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라는 인사를 수 없이 했는데 오늘은 그 말이 그냥 인사로 들리지 않았다.
세모에 길 잃은 천사의 야윈 모습을 보며 동굴이 된 내 가슴으로 스쳐가는 밤바람마저 자리 잃은 유성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고, 바람에 일렁이는 달과 스산하게 보채는 남은 잎새들의 노래도 서럽게 들렸다. 아! 혼자가 아니고 기다리는 이가 있고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가끔 목적지도 없이 휭하니 집을 나왔다가 우리 산장 캐빈에 며칠 묵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책 몇 권 싸들고 와서 다 읽고 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까지 와서 책만 읽으려면 뭐 하러 왔느냐 라고 물으면 집에서 드리는 기도가 산 기도와 다르듯이 독서의 맛도 다르다며 홧김에나 가져보는 오붓한 시간이란다.
이민생활의 일상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충동을 겪은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할 것이다.
며칠 전 평소 집안일에 충실하고 식구밖에 모르던 친구가 혼자 불쑥 나타났다. 집과 식구들을 떠나서는 하루도 못 사는 그녀가 무슨 일로 집을 뛰쳐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푹 쉬라며 뚝 떨어진 캐빈에 한참 혼자 두었다.
“기분 좋을 때는 갈 곳도 친구도 많더니만 홧김에 집을 나오니 갈 곳이 없더라. 그런데 네 생각나서 여길 오는데 갈 곳이 생기니까 80마일로 밟게 되더라구” “그걸 이제 알았어, 멀다더니 오늘은 우리 집이 제일 가까웠어? 속 보인다” “넌 친구도 아니야. 하소연도 들어 주지 않고 약만 올리고” “내가 그렇게 맹한가? 오자마자 오냐오냐 해주면 우리 집에 붙어살려고 할 텐데” “그래 잘난 글쟁이, 그래도 오늘 갈 곳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그 친구는 나와 수다 떠는 동안 화가 풀리는 듯했다. “너 며칠 있을 꺼야? 가방이 크던데” “한 열흘 소식 끊고 있다 갈려고 했는데 이틀만 있을래” “그 사건이면 하루로 끝내도 되겠다. 도망손님은 하루만 재워주거든”
평소 착실했던 주부들도 연말연시가 되면 괜히 우울해지거나 사춘기 때처럼 예민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집을 뛰쳐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단다. 그래서 평소 건전한 생활철학과 신앙생활도 중요하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좋은 친구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정말 다사다난했다. 지난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반성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어떻게 살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하룻길에도 목적지가 있듯이 우리 삶에도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 온 세상이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고 있는지, 진정한 축제의 의미를 되새기며 장차 내 영혼은 어디로 갈 것인지도 생각해 보자. 선한 일에 목적이 있고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의 발걸음은 언제나 활기차다. 새해부터는 그 노파도 20년 간 안고 살아온 “어느 RV 팍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염려를 접고 이제 그 곤한 영혼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해야 되지 않을까.
이성호
시인· 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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