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하고 지프차가 서는 소리가 나더니 철모를 쓴 모르는 이들이 들어섰다. “아기만 안고 문 안에 섰다가 신숙 선생이 타신 트럭이 오면 얼른 타십시오. 짐은 안 됩니다.” 그 한마디 던지고 훌쩍 가버렸다.
신숙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요원으로 김구 선생이랑 함께 귀국하신 분인데 남편의 누님 내외가 만주에 사실 때 가까이 모시고 뒷바라지를 하셨던 인연으로 우리 결혼식 주례를 서 주셨는데 제헌 국회의원이셨던 그 분에게 시누님은 애가 “아기가 있으니 도와주십사” 청을 드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는 아기를 꼭 싸서 안겨주시며 “한 사람이라도 먼저 피할 수 있어 잘됐다”고 하셨지만 얼마나 미안하던지……. 기저귀 가방 들고 아기를 가슴에 품은 채 부산에 도착한 나는 영주동에 있는 서양화과 후배인 ‘덕수’네 집에 방학 때 놀러가던 때처럼 “어머니”하고 들어섰다. “아이고. 니 올 줄 알았데이, 알라는 언제 낳았노” 하시며 얼른 아기를 받아 안으신다.
덕수 어머니는 가까이에 방을 얻어주시고 우선 필요한 살림살이를 빈틈없이 챙겨주셨다. 피난살이의 유일한 어려움은 물 고생이었다. 아기를 업은 채 양동이를 들고 긴 줄에 늘어섰다가 겨우 받아오면 쌀을 씻고 그 물에다가 기저귀를 담그고……. 말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아기가 몹시 울어 기저귀를 열어보니 설사였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물리면 조금 빨다가는 울고, 열어보면 설사이고, 이제 기저귀는 동이 났는데 아기는 젖도 안 빨고 도리질을 하며 울어 제치고, 아기를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학교에 나가던 이 엉터리 엄마는 속수무책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울고 말았다. 그 때였다. 바로 덕수 어머니가 나타 나셔서 “야야 퍼뜩 알라 업고 병원에 가야재 울고 앉아 있으면 어야노!” 추상같은 한 마디를 던지시고는 산더미 같이 쌓인 젖은 기저귀를 걷어 안고 나가시는 뒷모습에 후광이 비치는 듯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나의 영주동 피난생활은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안가서 끝이 났다.
시누님 내외분은 화물차 지붕에 앉아 부산진에 도착하셨는데 “함께 있으면 마음이 노이겠다”며 연락이 왔다. 매부님은 용의주도한 분이셔서 피난열차가 김해 역에서 오랜 시간 멎고 있을 때 곡창지대에서 출하하는 흰 쌀을 세 푸대나 사서 화물차 꼭대기에 싣고 오셨다.
나는 여름 내내 서울에서 피해 다니며 폭격소리에 놀라 아기를 조산하고 보리죽도 배부르게 못 먹던 일을 생각하면 쌀푸대만 보아도 흐뭇했다. 물 부족은 어디나 같았지만 시누님은 아기를 무척 좋아하셔서 잘 봐주시고 내게 대해 관대하게 대해 주셔서 편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다. 집안 살림을 해보지 못했던 나는 그때 허드렛일을 익혔던 것 같다.
일선에서는 일진일퇴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도 후방의 우리들은 편히 지내고 있었다. 남편은 어디쯤에 가 있을까. 소식이 끊긴지가 4개월인데…….
매부님은 매일 나가서 정보를 듣고 오셨다. “중공군은 무기가 없이 나팔 한 개씩 만들어 일열 횡대로 뻣뻣하게 선채로 천천히 큰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나팔을 불면서 걸어오는데, 총을 쏘면 앞줄에 선 놈이 쓰러지고 바로 뒤에선 놈이 시체를 밟고 나오고 그 놈이 맞으면 뒤엣 놈이 또 시체를 밟고 나오고 끝도 없이 쓰러지고, 나오고를 반복하면서 앞의 일선은 확실하게 한 걸음씩 전진을 해 온대요. 이쪽은 무기는 좋지만 쏘아도 다가오니 당해낼 수가 없대. 그게 바로 모택동의 ‘인해전술’이라는 군”
매부님은 그렇게 말씀 하시고 나를 힐끔 건너다 보셨다. 나는 그때 제법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전사 통지서’가 언제 날아와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단단히 다짐을 했지만 사실 육군대위와 결혼을 하고 얼마 안 돼 6.25가 터졌으니 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군인이란 일단 유사시 자기 목숨을 내던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상식 외에는…….
매부님은 어느 날 호외 한 장을 들고 오셨다. “이북 피난민이 10만명이나 미군 수송함에 실려 오는 바람에 거제도는 터질 지경이라는군. 흥남부두에서 군함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니 세브란스 출신 군의관이 태워주자고 울면서 ‘종족으로서 나남 이 배를 타고 갈수 없다’고 함대 사령관에게 매달렸대. 미 육군 10군단 사령관 아몬드 소장은 기자의 질문에 ‘나라의 귀중한 군비를 태워버리고 적국의 인민을 싣고 왔으니 나는 군법회의에 설 각오를 하고 있다’고 답변하드래. 대단한 인간애에다 군인정신이 투철한 훌륭한 미국인이군!”
몇 달 후 남편에게서 사람이 왔다. “민간인이 사는 후방이니 오라”고. 나는 그 곳에서 L.S.T.를 타고 온 눈빛이 또렷한 1,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린 남편과 살아서 만났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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