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연인’ 이후 재결합한 팀과 환상 호흡…
미주를 통해 변화된 절 발견해요
13일 밤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앞 오피스텔 건물의 지하 주차장.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커다란 숄로 몸을 둘둘 만 배우 김정은(31)이 SBS TV ‘연인’의 촬영에 한창이었다.
전날 청주에서 촬영 도중 고열을 동반한 인후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링거를 맞아야 했으나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빡빡한 촬영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상경, 다시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배우의 컨디션은 밑바닥이기 마련.
그런데 마스크를 벗은 김정은의 얼굴에서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즐거운 기운이 솔솔 풍겨나왔다. 아픈데도 이 정도이니 그렇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까.
이놈의 감기만 아니면 더 재미있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며 미소 지은 김정은은 사실 몸이 좀 많이 힘들지만 그것만 빼면 드라마 촬영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 시청률로는 잡히지 않는 사랑 느껴
사실 ‘연인’의 시청률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평균 15%대. 시청률 수치로만 보면 주연배우가 그리 즐거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연인’이 2004년 시청률 50%를 넘기며 돌풍을 일으켰던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신우철 PD-김은숙 작가 3인방의 재결합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김정은의 생각은 달랐다.
촬영을 앞두고 정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같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 드라마를 만들 땐 본전만 해도 잘한다는 생각이었어요. 1편보다 2편이 재미있긴 어렵잖아요. 그러면 ‘그럼에도 왜 해?’라는 질문을 하시는데, 우린 대단한 성공을 바란 게 아니라 다시 모인 만큼 좀 더 잘 만들어보자는 순수한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시청자들이 ‘연인’을 ‘파리의 연인’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전혀 다른 드라마로 봐주시고 있어요. 그리고 시청률은 높지 않을지 몰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정말 많은 분들이 보시고 사랑해주셔서 전 행복합니다.
실제로 ‘연인’ 팀이 피부로 느끼는 시청자들의 사랑의 온도는 상당히 높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홈페이지 게시판을 봐도 그렇고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강재(이서진 분)와 미주(김정은)가 주고받는 애틋한 대사가 젊은 여성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
홈페이지 들어가서 시청 소감을 읽다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요. 우리 드라마가 대사가 많거나 구체적이지 않은데도 시청자들이 그 여백의 의미를 다 알아주시는 거예요. 그 복잡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 알아주시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 자신과 닮은 미주 통해 강도 높은 감정이입
이러한 반응과 함께 김정은은 다시 만난 김은숙 작가와의 호흡에 남모르는 기쁨을 더하고 있다.
미주가 저랑 많이 닮은 거 눈치 채셨어요?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니라 김 작가님이 절 알고 미주 안에 제 모습을 녹여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린 서로 미주의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자고 얘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김 작가님이 제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아서 상황마다 적절히 반영을 해주시니 저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미주라는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잘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미주가 자주 듣는 왜 그렇게 착해요?라는 질문을 김정은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착하다’는 의미는 사전적 의미일 수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다. 때로는 상대방의 비아냥거림이나 불쾌감이 실려 전달될 때도 있기 때문.
극중에서 유진(김규리)이 미주에게 그렇게 말할 때 하마터면 발끈할 뻔했어요. 제가 평소에 그런 말을 좀 듣는데 그게 어느 순간 칭찬으로 안 들리더라구요. 실제로 제가 그런 말에 나 안 착해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 순간마다 김 작가님께 깜짝깜짝 놀라요. 미주가 저더라구요.
그런데 김 작가의 재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녀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파리의 연인’ 때보다 한층 원숙해졌다.
남녀의 심리를 너무나 잘 파악해서 그 밑바닥을 건드리는 김 작가님에게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강재가 미주에게 ‘왜 피합니까. 우리가 뭘 어쨌다고’라는 대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강재는 미주에게 말 그대로 ‘피하지 말라’고 한 것인데, 미주는 둘 사이에 있었던 감정의 교류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무너지잖아요. 대사 하나하나, 지문 하나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런 감성이 정말 좋아요.
그 덕분에 김정은 역시 장면마다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눈빛과 표정으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영화 ‘사랑니’ 찍으면서 많이 배웠는데 거기서 배운 것을 이번에 새삼 느끼고 있어요.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서 있는 것은 화면에 분명 다르게 보여요. 대사와 행동은 절제돼 있지만 배우가 연기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표현이 되더군요. 미주 연기하면서 여러 가지 마음이에요. 마음이 많아요. 그래서 시간이 부족한 드라마 촬영이지만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안될 것 같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장면마다 여운을 곱씹으며 연기하고 있습니다.
◇ ‘파리의 연인’ 이후 2년… 모든 것은 변한다
’연인’의 방송을 앞두고 사람들은 김정은이 ‘파리의 연인’ 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 수록 그것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연인’의 미주는 ‘파리의 연인’의 태영이 아니다. 캐릭터 자체가 다르기도 하지만 시간도 흘렀고 그 사이 김정은도 변했다. 누구나 변하듯이. 유쾌한 코믹함이 줄어든 대신 더 설득력 있고 연륜이 묻어나는 편안함이 보태졌다.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님이 방송 보시고 문자를 보내왔는데 ‘정은 씨가 어떤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 같아요’라고 하셨어요. 정말 기분 좋더군요. 사실 첫 촬영때 감독님이 ‘왜 더 안 해요?’라며 살짝 서운해하셨어요. 예전처럼 좀 코믹하게 해주길 바랬던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전 더 안 되더라구요. 알게 모르게 저도, 상황도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미묘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예전처럼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제는 안 되는 거 있죠?
이러한 김정은의 변화로 인해 ‘연인’은 예상을 깨고 ‘파리의 연인’과는 다른 드라마로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영화 ‘잘살아보세’부터 감지되온 김정은의 작은 변화들이 그의 배우 인생의 제2막을 열어젖힌 듯하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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