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보내고 갈 길을 잃어버린 여자는 선 자리, 그 바위처럼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이대로 뿌리를 내려버리겠다고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시는 그 누구의 눈길이나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는 나무, 그 누구의 흐느낌에도 돌아보지 않는 나무, 그 누가 다가와 끌어안거나 걷어차도, 속삭이고 간질이고 입을 맞추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리라. 다시는, 다시는…
여자는 나무가 되었다. 여자의 한숨과 더듬거리는 말을 실어 나르던 바람은 여자의 머리카락과 옷깃, 아니 나부끼는 이파리와 각질로 굳어지는 표피를 들추고 줄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의 곁에 남아 머뭇대던 그의 체취와 눈길과 목소리가 여자의 몸속에 들어 어망 속에 갇힌 물고기처럼 몸부림쳤다. 잠시 여자의 몸이 폭풍을 만난 듯 몹시 흔들렸다. 땀 같고, 눈물 같고, 피 같은 무엇이 가시처럼, 화살처럼, 여자의 깊은 곳에서 튀어 올랐다. 눈이 부셨다. 너를 놓아주어야 하나. 그새 발바닥에서 마구 돋아난 뿌리로 선 자리를 질끈 움켜잡은 여자의 입가에 고통스런 미소가 스쳐갔다.
감은 눈 속에서 어느 새 우듬지로 기어오른 여자의 시선은 벌써 길목을 돌아선 그의 등덜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것인지 모를 머리카락 한 올과 손톱만한 마른 잎 하나가 떨어질 듯 안타까이 매달려 식은 가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몸을 흔들며, 업혀 가는 여자의 아이들이라도 되는 듯이 말끄러미 여자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네거리까지 가려면… 여자는 숨을 멈추고 그의 걸음을 셌다. 그는 언제나 행진곡조로 걸었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여자와 헤어질 때 그 헤어짐의 무게로 잠시 ‘안단테’로까지 늘어졌던 발걸음은 어느 새 ‘모데라토’를 지나 ‘알레그로’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금방이라도 그의 잘 닦인 구두 끝에서 천지를 흔들 듯 우렁찬 군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다. 핫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싸아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군인들은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행진연습을 한다지. 이미 그의 ‘할 일’의 범주에서 벗어난, 그의 발목에서 내던져진 모래주머니 같은 여자는 더 이상 그와 보조를 맞추느라 서두를 필요 없이 만만세세 길가에 선 나무가 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느라 그가 마지못해 걸음을 멈춘다. 모를 일이다. 그렇게 비켜선 순간에도 그의 안에선 핫 둘 셋 넷 행진곡이 계속되고 있는지. 어쩌면 급한 마음에 ‘비바체’나 ‘프레스토’ 쯤으로 빨라지고 있는지도 모르다. 자전거는 영겁의 인연을 풀어내는 실패처럼 천천히 굴러오고 참을성을 잃은 그는 자전거 뒷바퀴가 그의 앞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획 매몰차게 몸을 틀어 발걸음을 옮긴다. 그 바람에 자전거가 비틀거리고 그의 등에 업혀 있던 마른 잎이 후룩 떨어진다. 울컥 여자의 눈에 물이 고이고, 그의 발은 떨어진 마른 잎을 가차 없이 부수고 철벅, 여자의 눈물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행진을 계속한다. 핫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싸아나이로…
우수수, 무수한 잎이 날아오른다. 나무로부터 마음 따라 숨결 따라 떨어져나간 마른 잎들이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공중을 떠돌다, 떠돌다 부서져 사라진다. 잎마다 매달렸던 여자의 시선도 부서져 사라진다. 얼마나 많은 티끌이 저렇게 허공을 맴돌았을까. 얼마나 많은 마음이 저렇게 부서져 사라졌을까.
여자는 후둑 몸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엉켜 있던 하늘과 땅이 어렵게 갈라지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달리는 자동차들 소리 사이로 벌레처럼 여자의 가슴을 파먹는 울음도 들려왔지만 나무가 된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떨리는 가지 위로 어둠을 탄 이슬이 내려앉았고, 이슬마다 별빛이 맺혔을 때 응어리진 슬픔의 그림자 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여자의 뿌리를 지그시 밟으며 지나갔다. 어둠 속 저만치에서 돌아선 고양이는 촛불처럼 노란 눈을 반짝이며 여자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둥치에 시린 등을 비볐다.
그날 밤 여자는 웅크린 검은 고양이를 불거진 뿌리 사이에 놓아둔 채 잠을 잤다. 잠 속에서 고양이는 검은 구름이 되었다. 검은 구름은 그를 따라 길목을 돌아 네거리로 나섰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낮게 내려온 구름은 후광처럼 그의 머리를 감싸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행진곡 박자가 뒤엉키더니 마침내 그가 꽈당 넘어졌다. 그 바람에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을 보면서 여자는 저도 모르게 흐흐 웃고 말았다. 마주보던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검게 일그러지고, 그렇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방망이로 밀어낸 넓적한 밀가루 반죽이 되어서 젖은 나뭇잎처럼 철썩 여자의 얼굴에 달라붙기까지는 말이다. 여자는 자신의 숨통을 막고 생명을 빨아대는 그의 검은 얼굴반죽과 싸우느라 발버둥을 쳤다. 이빨과 손톱을 세워 찌르고 할퀴고 물어뜯었다. 야옹, 야옹,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여자의 고막을 찢었다.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찬 깜깜한 밤이었다.
여자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자리에 나무로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세상이 보였다. 잎을 벗어 가는 나무들의 세상, 그들 속에 메마르고 파 먹히고 망가진 채, 옹이진 상처를 넘어 길을 뚫고 뚫어 끊어지려는 생명수를 잇고 또 이어놓은 세상.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영겁의 실패가 인연을 풀고 감으며 굴러가는 세상이 한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세상을 그대로 깊고 푸른 그늘로 안을 수 있다면, 아니, 숨만 쉴 수 있다면, 가끔씩 헉헉 숨통을 막는 슬픔을 뚫고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여자는 나무로 살다 나무로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허공을 가로지른 저 만치에는 언제나 길목을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날마다 그의 등에서는 업혀가던 마른 잎이 떨어져 부서지고, 여자의 웅덩이를 밟고 가는 그의 발에서는 철벅철벅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여자는 그렇게 매일 선 채로 부서지는 연습을, 그의 발밑에서 철벅이는 웅덩이가 되는 연습을,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는 연습을, 부서진 허공에서 자신을 모아 다시 나무로 서는 연습을, 그 속에 생명수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연습을, 핫 둘 셋 넷, 행진곡에 맞추어 했다. 안단테에서 모데라토, 알레그로, 그리고 비바체를 거쳐 프레스토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온종일 자신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연습을 하다가 밤이면 고양이를 맞아 밤새도록 그의 검은 얼굴반죽과 싸웠다.
날마다 여자의 가지는 허공을 가로질러 길어지고 무성해졌고, 그는 여자의 가지 밑을 지나 바쁘게 걸어 다녔다. 그는 빤질한 구두를 수없이 갈아 신으며 부지런히 돈을 벌어, 먹고 치장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숨결이 지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잎을 떨구고 가지들을 부러뜨리며 온몸을 떨고 있는 여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으며, 힘겹게 여자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한번 없이, 그녀들과 작별을 나눈 골목을 돌아서기가 무섭게 곧바로 행진곡 박자에 맞춰 씩씩하게 걸어갔다. 점점 더 빨라진 그의 발걸음은 새로운 고장, 새로운 나라를 찾아 여자의 둥치로부터 멀어져갔지만, 언제나 여자의 가지 밑이었다.
이미 지구의 반 이상을 덮어버린 가지들을 떠받치느라 여자의 몸통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사원의 기둥처럼 굵어지고, 그 어떤 울음도 새어나올 수 없는 단단한 각질로 덮였다. 여자의 가지는 이제 지나가는 구름을 간질일 만큼 높은 곳에 닿아 있었으나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땅거죽에 붙어 있는 단 한 사람, 행진곡조로 걸어가는 그에게 묶여 있었고, 밤이면 여자의 숨통을 틀어막는 검은 얼굴반죽도 여자의 각질에 못지않게 두꺼워져 있었다. 여자는 검은 얼굴반죽과 싸우기 위해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했고, 고양이 것인지 제 것인지 모를 울음을 들어야 했으며, 그렇게 메마르고 거대해진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여자의 뿌리들은 더 깊고 어두운 땅 속을 파고들어야 했다.
가로막는 돌멩이들을 비켜가며 갈팡질팡 메마른 어둠 속을 헤매던 여자의 뿌리들은 어느 날 겨우 한 방울의 습기를 만났다. 꿀보다 달고 꽃보다 향긋한 그것 앞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슬픔과의 싸움으로 지치고 메마른 여자의 눈을 씻어주었기에 마침내 여자는 볼 수 있었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굴러왔는지, 넘어져 하얗게 허공을 젓고 있는 자전거 바퀴를. 땅 위로 사납게 불거진 여자의 뿌리를 잡고 일어서는 한 계집애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 계집애의 무릎에서 떨어져 마른 흙을 적시는 새빨간, 꽃 같은 핏방울을. 그리고 계집애의 손을 잡은 그의 벗겨진 머리를.
그는 계집애를 나무 그늘에 앉히더니 고개를 숙여 상처 난 무릎에 입을 맞췄다. 숙여진 그의 머리 위로 지는 해를 품은 구름이 반짝이며 지날 때, 여자는 문득 뿌리를 타고 오르는 뜨겁고 저릿한 전율을 느꼈다. 너도 아팠겠다. 계집애의 꽃봉오리 같이 작고 뾰족한 입술이 여자의 뿌리에 콕, 도장을 찍듯 닿았던 것이다.
여자는 어느 새 자신의 온몸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검은 얼굴반죽이, 뚫을 수 없이 두껍고 단단하던 검은 구름이 마침내 부서져 자신의 메마른 몸을 적시고 있음을 깨달았다. 해가 저물도록 그들은 여자의 굵은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계집애의 뺨에 얼룩진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흩어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어루만져주고, 그의 해진 구두코에 떨어진 노란 잎을 계집애의 작은 손바닥에 가만히 내려놓는 것을 여자는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날 밤 고양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걸었던 나무의 마법에서 풀려난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이 나무로 섰던 자리를 떠나 천천히 세상의 거리를 걸어갔다. 더 이상 행진곡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는 어떻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길목마다 허공을 찌를 듯 내뻗은 나뭇가지들을 어루만져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넘어뜨릴 듯 불거진 뿌리들을 쓰다듬으며, 여자는 숨을 쉬었다. 노래하듯이 천천히. 안단테 칸타빌레. 세상의 눈물과 땀과 피를 받아 마시듯 정성껏, 구름을 간질이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부서지고 흩어져 보이지 않는 마음들 속에서 숨을 쉬었다.
약 력
1993년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 단편소설 당선
1994년 현대문학 중편소설 당선
2003년 작품집‘환기통 속의 비둘기’발간
2006년 제14회 미주문학상 수상
<김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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