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경(주부)
386이라 하면 86년 인텔사에서 출시한 퍼스널 컴퓨터의 주 기억장치 시리즈 번호를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80년대와 90년대 초,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자유와 민주를 위해 투쟁하던 젊은 운동권 세대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해가 81년이니 사실 나는 386을 비껴간 세대가 맞다. 말하자면 컴퓨터 부팅하는 데만 수분이 걸리던 8비트 세대라 할까.
그럼에도 순전히 아이가 늦은 이유로, 요즘 내가 만나는 여인들은 반짝 반짝한 386세대가 태반이다. 모임에서는 설거지에서도 쫓겨났고 커피를 받아 마셔도 1순위이다. 말하자면 경로우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아니거든 나도 80년 그 봄에 서울역 광장에 하이힐 신고 갔었거든.’ 툴툴거려 봐도 잘 배운 우리 386아줌마들은 ‘됐거든요, 과일이나 깎으세요.’ 깍듯이 존대한다.
아이들 키우는 얘기에 살림 사는 솜씨에 그들의 총기를 보태고 계획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코리안 아메리칸의 출중함이 어디서 왔는지 금새 눈치챌 수 있다. 일제와 전쟁의 시린 바람을 이겨낸 질경이 같은 우리 어머니의 배고픈 허리춤에서 자라난 386세대의 야무진 손끝과 눈썰미 그리고 강한 생명력은 뱃속에서 받아 나온 대물림일 것이며 최루탄 냄새를 피해 달아난 어느 시장길 후미진 선술집에서 ‘자유’ ‘민주’ 그 가슴 끓는 단어에 눈물짓던 정열의 피는 이제 세계를 향한 왕성한 의욕으로 이어져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접하는 요즘의 한국 사회는 386정치인들을 친북 좌파라든가 반미라든가 심지어 싸움만 잘하는 집단으로 묘사하며 자조하고 폄하시키는 분위기가 주류이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읽게 된 무슨 일보의 사설은 점입가경이다. 그것도 의견이고 공감하는 부류도 많다니까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근거해서 존중되고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설은 노대통령의 정부에 흠집을 내고자 하는 의중을 가지고 교묘히 왜곡하고 편집되어서 386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건강한 개혁정신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첫머리에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에서 보도했다고 토를 달면서 ‘나라를 거덜 낸 386정치인의 대죄가 역사의 법정에 섰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뉴스위크의 주장인지 그 신문의 주장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서. 더군다나 그 기사 출처지가 한국판 뉴스위크의 한국기자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숨기고 미국에 의해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준다. 미국의 눈에 맞추어 평가 시키려는 유아적 발상이다. 행여 미국에 대한 반감을 주장하면 은혜도 모르는 패륜아로 취급하거나 당장 전쟁이 나서 나라가 망할 것처럼 여론을 몰아간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
가진 사람의 지갑을 열어 못 가진자에게 나누어 주자면 좌파라고 몰아세우는 논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문제는 가진자가 제 의무를 다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면 적당한 세금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은 기본 의무이며 도리이고 나만 잘나서는 될 수 없는 일인데 지갑을 열라면 빨갱이라고 한다. 서민 걱정은 혼자서 하면서 말이다. 독재 시대 때 밀실에서 쓱싹 행해져서 몇몇 사람들의 배를 채우던 거래를 뒤돌아 보고 그리워해도 시대는 변했다. 현대도 삼성도 알아서 1조원의 사재를 사회에 환원시키고 상속세도 법대로 1조원 넘게 내겠다고 한다는데 그 투명함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잘했다는 말 한마디 없다. 오히려 재벌이 위축될까 걱정하는 논조이다. 세계 경제 규모 10위 국가, 미국 다음으로 중대형 차가 많이 팔리는 나라인데도 경제 경제한다. ‘배고픔의 세월을 몰라서 그래.’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들의 ‘봉순이 언니’의 희생을 강요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잘살고 뻔뻔한 것 아니겠는가.
풀뿌리 민주, 민초들이 일구어 가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한국 사회의 자리매김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비록 그것이 시행착오가 있고 암초에 걸리고 한들 시간은 흐를 것이고 총명한 한민족의 눈은 열릴 것이며 슬기롭게 만들어 갈 것이다. 가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묻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이 전라도세요? 아 슬프도다. 그래도 희망은 보인다, 386!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