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릴레이 경주처럼 한 선거의 끝은 또 다른 선거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정치의 지겨운 일면이기도 하고 짜증나 하면서도 시선을 떼기 힘든 정치의 매력이기도 하다. 지난 주 중간선거가 끝나면서 2008년 대통령 선거를 향한 민주·공화 양당 내 예비주자들의 움직임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거후 48시간도 채 못돼 출마를 선언한 첫 주자는 아이오와주 민주당의 톰 빌색 주지사였고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엊그제 캠페인 준비팀을 구성했다고 밝혔으며 중간선거를 통해 공화당내 가장 인기있는 리더로 입지를 굳힌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미 지난 주말 출마준비위원회 발족 계획을 흘려 두었다.
그러나 2008년 대선의 첫 투표가 될 아이오와 코커스를 14개월 남겨둔 현재, 가장 주목받는 주자는 이들이 아니다. 발 빠르게 움직이긴 하지만 이들의 면면은 밋밋하다. 미디어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사랑하는 것은 이들처럼 ‘늘 보아 온’ 평범한 백인남성 후보군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얼굴이다. 신선하며 흥미로운 뉴페이스라면 금상첨화다. 그래서 ‘첫 여성대통령’ 힐러리 클린턴과 ‘첫 흑인대통령’ 배럭 오바마를 끈질기게 조명한다. 이들의 출마는 승패와 관계없이 2008년 대선의 가장 익사이팅한 관전 포인트로 떠오를 것이다.
중간선거 다음 날 미국정치에 관심이 깊은 한인인사 몇 분의 분석을 들었다. 그중 한분이 선거결과를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정치의 새 시대로 나가는 문은 열어 준 셈이지요” 문만 열어 놓았을 뿐 새로운 방향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증은 아직 풀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가 역사적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자 화제는 자연히 힐러리와 오바마로 옮겨졌다. 모두 두 사람의 자질과 상징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대해선 말꼬리를 흐렸다. 인종이든 성별이든 ‘편견’이라는 이슈에 관한한 미국인들이 상당히 후진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힐러리와 오바마가 예상대로 오는 대선에 뛰어든다면 선거의 분위기는 지난 선거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정치적 전략이나 정책 대결보다는 성별과 인종의 상징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오바마는 상당히 끌리는 후보다. 자신의 표현대로 ‘우유처럼 하얀’ 어머니와 ‘칠흑처럼 검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백인 외가에서 성장한 라이프 스토리도 흥미롭고, 하버드법대 출신의 지성이나 군중을 열광케하는 카리스마도 예사롭지 않으며, 만사를 선악으로 구분짓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치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 자신감도 참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실제로 한표를 던져야 할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후보 오바마에 대한 망서림의 이유는 인종이 아니다. 경험의 부족이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한번 지냈을 뿐 이제 겨우 2년차 초선 연방 상원의원이다. 이라크전쟁과 테러, 핵확산 등의 국제난제나 소셜시큐리티와 헬스케어, 불법이민 등의 민생정책들을 떠맡기기엔 솔직히 좀 불안하다.
힐러리는 다르다. 준비된 후보다. 2008년 대선은 56년만에 처음으로 현직 정·부통령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 말 그대로 오픈 레이스다. 후보난립과 함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값비싼 선거전이 될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비해 힐러리는 이미 후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막강한 자금력, 최고의 캠페인 조직, 강력한 지지층, 그리고 민주당내 넘버원 전략가인 남편 빌 클린턴. 자질도 빠지지 않는다. 주요이슈에 대한 풍부한 전문지식을 갖추었고 판단력과 추진력이 뛰어나다. 어디서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스타성도 충분하고 적에게서 악수를 유도해내는 협상력도 인정받았다. 한때 급진적이었던 성향은 상원의원을 지내며 실용적 중도로 누그러졌다.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이라크전 지지입장은 반대로 ‘여성이지만’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쌓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여론의 68%가 힐러리의 리더십에 지지를 보낸다. 이만한 후보가 공화당엔 아직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 지도부 일각에선 힐러리 총력지지를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예선에선 이겨도 본선에서 진다면’이 민주당의 고민이다. 결국은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힐러리의 가장 큰 핸디캡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유권자들의 생각은 오히려 반대다. 90%가 ‘여성 대통령도 괜찮다’고 답한다. 남성 못지않게 외교, 안보, 경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쪽이 맞는가. 그 해답은 편견과 그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이성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가 기록될 것일지, 아니면 여성과 흑인이 힘을 겨루는 와중에서 다시 백인남성이 어부지리를 얻을지…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의 회의를 뛰어 넘어 ‘여성대통령 탄생’이라는 새 역사가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이 변화는 대통령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바꾸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첫 여성대통령은 머지않아 첫 흑인대통령, 언젠가는 첫 한인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열린 정치의 의미있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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