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빨간 차가 갑자기 속력을 줄이더니 차선을 오른쪽으로 옮기면서 종호의 차와 나란히 머리를 맞추지 않는가…
프리웨이에 오르면 공연히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달릴수록 위험이 많아지고 그리고 마음은 한없이 긴장된다. 아차, 하면 중상 내지는 사망이다.
“이런 쌍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방금 빨간 색의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종호가 모는 차 앞으로 가까스로 끼여든다. 종호의 차 뒤에는 텅텅 비었고 종호는 충분히 속력을 잘 내고 있는데 구태여 좁은 공간 속으로 끼어 드는 것은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종호가 공자이거나 바보천치가 아닌 바에야 욕설이 아니 튀어나올 수 없다. 쌍놈의 자식이 아니라 쌍놈의 자식과 비슷하다 했다. 이 정도의 욕이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다.
그 날의 일진에 따라서, 현재 기분의 좋고 나쁨에 따라서 욕설의 농도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나 옆에 점잖은 분이 동승했을 때는 ‘어럽쇼. 이 친구 좀 보게.’ ‘이 양반, 운전 한번 자알 하는군.’ 정도로 불쾌한 기분을 삭이지만 기분이 안 좋거나 옆에 얄미운 마누라가 타고서 바가지라도 긁고 있을 때는 ‘요새끼 봐라.’ ‘이런 시펄놈. 콱 받아 뿌릴라’ ‘운전 치오카치하고 있네.’ 이렇게 나온다.
오늘은 집안의 한 아랫사람한테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나이가 늙고 힘이 없어지니까 집안 사람들한테까지도 권력누수현상이 현저해진다. 이놈들이 말을 잘 안들을 뿐 아니라 이젠 서슴없이 거역하기까지 한다.
종호는 자기 차 앞에 끼어 든 빨간 승용차가 오늘 자기를 화나게 만든 집안의 아랫사람이기라도 한 듯 호되게 흘겼다. 그 이상은 아무 짓도 할 수 없다. 듣자하니 프리웨이에는 술이나 마약을 한 놈들, 사업상 손실을 보았거나 실연을 한 놈들, 그리고 운전 기술이 아주 미숙한 놈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다. 상대방이 운전을 예의에 벗어나게 했다고 해서 경적을 울리거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했다간 총알을 받을 수도 있다. 모두들 잔뜩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쉽게 오해하고 쉽게 미워하고 쉽게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니까 자칫 잘못되면 프리웨이는 악마의 놀이터가 된다. 그저 참아야 한다. 되잖은 욕지거리나 몇 마디 중얼대면서 말이다.
종호는 속력을 줄였다. 그 얄미운 빨간색 승용차를 바짝 뒤따라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처음엔 오른쪽으로 차선을 바꿀까 했는데 그쪽에는 느린 차들이 줄을 잇고 있었으므로 마음을 접었다. 그리하여 이왕이면 빨간 차와 자기 차 사이에 다른 차들을 넣어서 아주 그 차와는 인연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력을 더 늦추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빨간 차가 갑자기 속력을 줄이더니 차선을 오른 쪽으로 옮기면서 종호의 차와 나란히 머리를 맞추지 않는가. 종호는 곱지 않은 눈빛으로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검은 수염이 온통 얼굴을 덮은 무섭게 생긴, 건장한 흑인이었다. 그의 옆에는 풍선같이 찐 흑인 여자 하나가 조수석의 공간을 꽉 채우고 앉아 있었다. 종호는 일단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겁을 낼 일이 아니다. 종호는 현재까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일어날 리 없다.
종호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공손히 눈빛을 거두고 외면을 하였다. 그리고는 가속페달에 조금씩 힘을 주어서 그들을 앞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들이 차선을 바꾸고선 종호의 뒤를 바짝 따르기 시작하였다. 종호의 뒤를 따르는가 했더니 어느새 인지 종호의 옆으로 다가와서 종호의 차를 이쪽저쪽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좀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오해를 하는가 싶어 차를 빠르게도 몰아보고 느리게도 몰아보고, 가끔씩은 차선을 바꿔보기도 했는데 어럽쇼, 그 흑인들의 차는 언제나 종호의 주변을 돌면서 힐끔거리면서 뭔가를 부지런히 살피었다.
드디어 종호는 속력을 내어서 내빼기 시작하였다. 종호의 차는 그들의 차보다 성능이 좋은 것이어서 단번에 그들을 멀찌감치 뒤로 처지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빨리 차를 몰았음인지 차체가 몹시 떨면서 텔레레텔레레하고 소리를 내었다. 종호는 차체가 조용해지도록 속력을 늦추었다. 빨간 차가 오랫동안 보이질 않았으므로 종호는 안심하고 다른 차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평화롭게 프리웨이의 흐름에 합류하였다.
종호는 그 빨간 차에 대해서 생각을 잊어버릴 때쯤 하여 무심코 오른쪽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엔 언제부터인지 아까의 그 흑인들의 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종호의 차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종호가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몹시 흥분된 듯한 분위기를 띄우면서 그리고 뭔가를 제각기 외치면서 종호를 향하여 손을 아래위로 흔들어대기 시작하였다. 어찌 보면 차를 세우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하기도 하고, 아니, 어쩌면 이것들이 종호를 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종호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주의해 들어 봤으나 헛수고였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잘못이 없으니 무서워할 일도 없다. 종호는 같잖은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하였다. 종호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하여 잠깐만에 그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속력을 내어서인지 차가 몹시 흔들리며 아우성을 치듯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종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한동안 달리다가 좀전의 일을 잊을까말까할 즈음에 아까 처럼 다시 무심코 옆을 보니 어느새 인지 또 그 재수 없는 빨간 차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종호는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썅놈의 쌔끼들. 정말 더럽게 놀고 자빠졌네.”
종호는 상을 있는 대로 찡그려 아주 험상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그들을 향해서 한국말로 소리를 쳤다. 그가 이만치 자신만만하게 소리칠 수 있는 것은 여차하면 그들의 차를 앞질러 멀리멀리 달아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순 한국말 욕지거리이긴 했지만 종호는 자기의 대담함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여유 있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종호는 그들이 뭔가를 빨간 글씨로 신문지에 써서 창문으로 내미는 것을 보고 그만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도록 놀라고야 말았다.
“오른쪽 앞바퀴가 위험하다.”
뻔뻔스럽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종호의 얼굴이 죽을상이 되었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종호의 차바퀴가 정상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지금껏 그것을 알리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마치 불량배를 만난 듯 오해하고, 오만한 자세로 피해 달아나기만 했던 것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종호가 속력을 늦추자 그 빨간 차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앞으로 달려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바퀴가 위험한 상태에서 그들을 뒤쫓아 갈 수도 없는 상태이고 보니 종호는 미처 감사의 뜻을 전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뼈가 저리도록 안타까웠다.
종호는 가까스로 긴급주차 구역으로 차를 몰아서 가만히 세웠다. 차가 서기가 무섭게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오른쪽 앞바퀴가 내려앉았다. 바퀴가 걸레 쪽같이 너덜너덜해 있었다.
종호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검은 천사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84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소설 입상/ 87년 해외문예지‘울림’에 단편 당선/2005년 단편 소설집‘악인의 부활’출간
<한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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