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인연’이라면 끝 또한 ‘인연’이겠지요. Q형, 무심코 써 오던 ‘운명’이란 말이 무척 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명운(命運)’이라 고쳐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주는 명(命)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뒤따르는 운(運)쯤은 노력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Q형, 제가 글 쓰면서 당신과 같은 분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음은 너무나 큰 복입니다. 게으름에 시달리고, 뭣인가 핑계거리에 휘말리게 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삿일입니까.
벌써 11월입니다. 더 늦기 전에 대답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미소 지으면서도 사뭇 따지듯 “당신의 종교가 뭣이며, 불교 이야기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예. 좋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 탓인지 모르지만 … Q형, 모두가 인연이겠지요. 저의 삶속에 녹아 있는,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오고 가며 나누었던 인연 때문일 것입니다 .
할머니 100일 치성”과 함께 ‘절집’을 찾았고,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독신 집안’의 첫째입니다. 옛날 산골 농촌 이야기입니다. 손(孫)이 귀한 집안의 할머니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손자 점지해 주십사” 절 찾아 ‘불공’ 드리는 일이 제일 큰 일이었답니다. 손자를 못보신 저의 할머니도 속이 타셨겠지요. ‘100일 치성’을 드렸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집안에 “꼬추”가 태어나자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시지 않았던지 ‘스님의 양아들 인연’ 을 맺어 주고, ‘수명장수’을 빌고 또 빌었답니다. 손자는 ‘멍멍고기’를 먹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 닭 잡아주며 들려 주시던 이야기입니다. 그땐 건성으로 들었고 물론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대학 다니던 시절입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서울 삼각산 금선암 “도공(道空)” 스님을 만납니다. 노(老) 스님께서는 자리 함께 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절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인가는 조사들의 이야기까지 듣게 됩니다.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대사로 이어지는 “조사선 (祖師禪)의 맥”을 듣게 됩니다. 하나같이 귀에 설지 않고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았습니다. 5조 홍인대사와 ‘일자무식’ 나뭇꾼 혜능(慧能)이 주고 받는 이야기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공스님께서는- 6조 혜능과 신수대사의 계송을 적은 - 백지 한장을 손에 쥐어 주며 김군, 잘 읽어 봐. 맛있을거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야기는 이렇다. 5조 홍인대사가 갈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문하 천여명 대중들에게 이른다.
“… 너희들은 속히 각자의 본성을 깨쳐서 반야의 진성을 체득함이 가장 긴요하니 모두들 그 증오한바가 있거든 토로하여 나에게 제시하라! 나의 뜻을 얻은 자는 달마 이래의 의법(衣法-의발과 법)을 전수하여 제6대의 조사(祖師)가 될 것이다!” 황매산이 들썩, 천여명 대중들이 머리를 싸맨다.학식과 신망을 자랑하는 제1좌 신수(神秀)대사가 계송을 먼저 밝힌다.” 몸은 보리(實悟智)의 나무요/마음은 명경대(明鏡臺)와 같노매라 /때때로 쓸고 닦아 /티끌이 나지않게 할지어다 .”참으로 훌융한 계송이라고 5조 홍인대사의 칭찬을 받는다.그러나 방앗간 노행자 혜능은 ”흠, 되기는 잘 되었지만 아직….”하며, 한수 계송을 읊는다.“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菩提本無樹)/ 명경도 또한 대가 없노매라!(明鏡亦無臺)/ 본래무일물이어늘(本來無一物 )/ 티끌이 어디메에 묻을 손가!(何處惹塵埃).” 이로써 노행자 혜능은 5조 홍인대사로부터 달마 이래 상승의 의법을 전수 받아 제6조 조사가 된다.=
도공스님께서는 뭣인가 일깨워 주려 하셨겠지만, 내가 “풍진 세상에서 풀어야 할 인연이 중했기 때문인지”그냥 또 그렇게 잊고 맙니다 . 한참 후 금선암을 찾아 하루를 쉬고, 헤어질 때입니다. 스님께서 저를 불러 방으로 들라 하시더니,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김군, ‘산은 무심히 푸르르고 (山自無心碧)/ 구름 또한 무심히 희네(雲自無心白)/ 여기 한 친구 오고 가건만(去來一上人)/ 그 역시 무심한 길손이라네(亦是 無心客).’자네 이야기야. 가슴에 새기고 잊지 말게.”
Q형,그러다 미국 바람에 휩쓸려 오늘 여기까지 와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꽤 오랜 인연이지요 .
그렇습니다. 인연”은 그냥 그렇게 사람사는 이야기의 ‘처음이고 끝’입니다. 그 가운데 당신과 나의 만남이 있고, 헤어짐의 내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합니까. 마음 내려놓고 들을 수 있을 때쯤이면 우리는 “하나”일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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